全作 장편 소설 폭 풍 주 의 보 서 주 홍 제 1 부 폭풍주의보 한바탕 세찬 바람이 불어올 날씨다. 또 한 이틀 선창 바닥을 온통 바람으로 뒤덮을,바다 쪽 검은 구름떼가 항구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다. 영민은 한참 창 밖 바다 쪽 하늘만 멍하니 내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주머니,그냥 갈게요.달아 놓으세요. 풀죽은 그의 목소리에, 아니,오늘도 외상여? 줄포댁은 설거지를 하다가 문을 열고 나가는 영민에게 소리를 친다. ...... . 영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린다. 이 놈에 술 장사는 뭐,바닷물 퍼서 허는 줄 아는개벼? 으이그,지겹다. 줄포댁은 영민이 마시고 간 술자리를 치우면서 신세 타령이다. 이 놈에 팔자는 허구헌 날 외상,외상만 주다가 넘 좋은 일만 시키고,나중엔 쫄딱 망하고 말지.외상 값 띠어 먹는 놈이 어디 한두 놈이어야지.사람 환장할 노릇이랑게.이 놈에 장사, 이거 안 헐 수도 없고,헐 수도 없고.고생허는 게 말짱 헛일이니. 줄포댁은 성냥통에서 아침에 피우다 남긴 담배 꽁초를 꺼내 연탄불에 불을 당긴다. 한쪽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줄포댁에게 한 마디씩 던진다. 참 줄포댁도,아,이 바닥에 줄포댁마저 없으믄 무슨 재미로 산다요? 다 베풀면 좋은 날 오지 않겄슈? 오늘도 해 다가는디 매상이 안 좋은개벼? 연거푸 담배 연기만 내뿜으며 줄포댁은 손님들 술자리로 다가가 앉는다. 그리고는 옆엣사람의 빈 술잔을 채우며, 이 장사 이 바닥이서 꼭 칠 년짼디 벌어 논 건 하나도 없고,요 모양 요 꼴이요. 하자,한 사내가 술잔을 비우고 줄포댁에게 술을 권한다. 자,줄포댁 한 잔 헐쳐? 술로 풀어야지.이 신세 알아 줄 작자도 없고. 그녀는 창 밖을 내다보고 말을 잇는다. 어찌,날씨도 시원찮은디 큰 비가 올랑가아? 아침 일기 예보에 폭풍주의보 내린다고 혔다는디.... 참,아까 그 사람 말여.혹시 칠성호 타는,거 김한석이라는 사람 아녀? 줄포댁이 담배를 비벼 끄며 대꾸한다. 칠성혼지 팔성혼지 그 배 선주 마누라 돈놀이허다 수 백 띠었다고, 아침에 누가 와서 그러 드니만,점심 땐 그 뱃사람들이 와서, 이번에 글쎄 일전 한푼 못 받았다고 한참 떠들다 갔 응게. 나도 작년에 그 집 배 탈 때 봤지만,그 집 아주머니 언제 한 번 큰 코 다친다 싶었는디 기 어이 그 꼴이 됐구만. 죄다 그 욕심이 문제랑게. 저기,줄포댁.그 김한석이 말여,외상은 많은가? 왜, 갚어 줄라고? 그게 아니고 말여,그 사람 대학 물 먹었다는디,알어? 줄포댁은 술잔을 비우다 뜻밖이라는 듯, 대학? 어찌 젊은 사람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드니.내야 그 사람허고 거래한 지 한 서너 달 됐는디 참 말 없는 사람여.근디,왜 배 탔디야? 사내들을 휘둘러본다. 우린들 알겄소? 다 뭔 사연이 있겄지라우.자,한 잔씩 허드라고이. 줄포댁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으로 된 문 밖을 내다보고는 아무래도 한바탕 거센 바람이 불어올 것 같다고 생각하며,방문을 열고 김한석의 외상 장부를 꺼내 든다. 그러다 혼잣말로, 이 장부 적힌 술 값만 받어도 집 한 채는 살 턴디. 한숨을 쉬며 장부를 편다. 벌써 삼만 원 넘은 지가 언젠디,지도 양심 있으믄 갚겄지.띠어먹기야 허겄어? 대학까지 다 녔다는디. 줄포집을 나온 영민은 배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출어 준비에 한창이었는데 출어는 틀린 것 같고, 그러나 갈 곳은 배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어디론가 다시 훌쩍 떠나고 싶은데, 아직 매인 몸인 것을 그는 스스로 느끼며 터덜터덜 배에 오른다. 왜 그리 기운이 없어? 어디 아픈 거 아녀? 영민은 동료 선원의 묻는 말에 고개만 가로 저으며 말없이 선실로 들어선다. 줄포집 댕겨오는가? 갑판장이 혼자 무슨 책을 읽다가 일어나 앉으며 묻는다.영민은 웃옷을 벗어 던지고 한쪽에 기대어 앉는다.어둑한 선실에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술 그만 먹어,이 사람아.인제 자네 술꾼 다 됐어.적당히 먹어.속 버리면 어떡허나? 몸땡이 하나 믿고 배 타는 사람이 몸 간수를 잘 혀야지.몸 하나로 버티는디. 다들 나갔는데 혼자 뭐 하세요? 금방들 다 나갔네.선주네 원망만 허구.말 들어 본게,말이 아닌 거 같은디.겨우 출어 준비 혔는개벼.사람이 돈 있다가도 없을라믄 한푼도 없겄지만 어지간히 힘든개벼. 그려도 우리가 좀 이해하고 혀야지.그렇다고 배 안 타네 허고 내릴 수 있겄어? 다 한 식구라고 생각혀야 지,별수 있겄나? 저야, 뭐, 다른 선원들이 문제죠. 괴로운 거 있어도 참어야지. 영민은 더 말을 붙이지 않는다. 내일 저녁 물에 배 나가니께 그리 알고 그만 쉬어. 예. 영민은 갑판장 옆에 눕는다. 얼마 뒤,술 기운에 다시 일어나 앉는다. 그가 배를 타기 전에는 전혀 술은 입에 대지 않았는데, 선원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제는 제법 술꾼이 된 셈이다.실제로 요 근래의 생활이 술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웠고, 오히려 술이 자신에게 적잖은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왜? 속이 안 좋아? 얼마나 마셨길래 그려? 잘 마시지도 못허믄서. 괜찮아요. 딴 무슨 안 좋은 일 있는가? 어둡지도 않은디 낮술 마시고.얼굴도 안 좋은디. 무슨 일 있긴 있는개벼? 아니에요. 참, 그러고 본게 기관장이 그러던디, 자네 배 그만 탈 것같이 눈치 보였나? 그게 사실여? 누워 있던 갑판장이 정색을 하고 일어나 영민의 앞에 마주보고 앉는다. 너댓 달 되었지만 갑판장은 영민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일처럼 생각해 주었고,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갑판장은 유달리 자기에 대해 너그러웠고, 얼마 되지 않아 겪는 선원 생활의 실수들도 감싸주곤 하였는데,영민은 내심 혈육으로 알고 가까이 해 왔다. 또한 갑판장은 무엇보다도 영민이 머지않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꼭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만난 처음부터 정말 친형제같이 이해를 하고 돌보아 주었다. 내가 볼 땐 아직 때가 아닌 거 같은디,무슨 소식이라도 들었나? 영민은 말없이 다시 눕는다. 자네, 나헌티는 못 헐 말 없잖여.내가 뭘 알어야 도와도 도울 거 아닌가? ...... . 딴 때 같지 않게 이 사람,바다에서 들어온 뒤로 이상헌 거 같어. 한참 있다가 영민이 무겁게 말을 꺼낸다. 어머니께서... . 어머니? 어머니께서 별로 건강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그려서,요새 며칠 그렸었구만. 곧 일어나시겠지요. 근디 언제 알었는가? 바로 입항해서 알았습니다. 영민은 옆에 있는 담배를 물고는 길게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는다. 그럼 선주헌티 말허고 한번 갔다가 올랑가? 사실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잖습니까? 참,그렇지. 갑판장도 한숨을 내쉰다. 순간,영민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당장이라도 가 보고 싶지만 아직은 이 자리에서 꼼짝없이 붙어 있어야 할 몸인 것을. 기관장이 헌 말,틀린 말이 아니구만.다른 때 같지 않고 집안에 무슨 사정이 있는 거 아닌 가 허던디.선원들도 말은 안 허지만,안 헌다고 모르는 건 아닌게.말 그대로 한 배 타는 사 람들인디. 갑판장은 영민이 평상시 기관장에 대해서 서운함을 갖는 것을 알고,기관장이 염려하더라는 말을 일부러 꺼내 덧붙인다. 근디 어떡헐 작정여? 그냥 이러구만 있는 거죠.어떤 방법도 없으니... . 그려도 한번은 가 봐야 헐 거 아니겄어? 경찰에서 진즉부터 제 집을 감시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겄구만. 저들은 학교에까지도 프락치들을 두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관찰하고,정보를 수집하는 사람 들이에요.벌써 제 주위 사람들을 파악하고,그들한테서 뭘 캐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려? 그렇다믄,후밴가 하는 아가씨헌티도 전화허믄 안 되겄구만. 도청이 쉬운 게 아니지만,만에 하나라도 도청될지 모르니까 조심해야지요. 이민 갔다는 그 형님이 어머니를 한번 보러 오믄 좋을턴디. 어머니께선 연락은 안 하세요.직접 연락이 와도 괜찮다고만 하실 분이에요.그 형도 한때 저같이 피신한 적이 있었는데,그러니까 두 아들 다 어머니께 무거운 짐만 지게 한 것이죠. 그렸어? 그러믄 인제 자네가 효도혀야겄구만.남은 여생 다혀도 부족허겄어. 그래야죠.그런데, 그게 그렇게 뜻대로 안 되니 가슴만 아프고 그렇습니다. 갑판장은 한숨을 쉬는 울적한 영민의 마음을 돌리려고 말을 바꾼다. 참 그 아가씨는 잘 있고? 졸업반이라 바쁜가 봐요.제가 서울 떠나올 때는 교생 실습 나간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원 래 어릴 적부터 꿈이 음악 선생님이 되는 거였거든요. 그 집에선 자네 좋아허지? 허긴 고향에서부터 알았응게 다 잘 알겄네. 부모님은 저와 연락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결혼할 나이가 되어 가니까 아마 저를 만나 지 말라고 하실 거에요.요즘 저같은 놈에게 시집 보낼 부모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언젠가부터 마음 놓고 집으로 연락도 못 하고.전화해도 남동생이나 받으면 통화할 수 있었 지,부모님이 받으시면 끊었지요. 나 같은 놈은 무식혀서 뭐 알겄나마는,이제 이런 생활 어서 청산허고 하루 빨리 새 생활 시작혀.사랑허는 여자 안 놓칠라믄 말여.물론 마음 먹고 있는지 아네만... . 두 사람은 더 말이 없다. 갑판장은 영민의 새 생활 말만 나오면 으레 빨치산이었던 자기 이복형의 이야기를 하곤 하였는데 오늘은 입을 열지 않는다. 지리산 토벌대에 잡히어 형무소에서 십 수 년을 있으면서 끝까지 사상을 전향하지 않고, 소위 그들이 외치는 인민 해방의 날을 기다리다 병으로 죽어 가면서까지 남한의 어떤 배려나 치료마저도 거부하고 결국은 인생을 마감한 이복형의 이야기를 영민이 배에 오른 뒤, 술자리에서 몇 차례 갑판장은 말한 적이 있었다. 갑판장에게는 이복형이었지만,전쟁 전까지는 한 집에 살면서 이복형의 모든 것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사실 그 자신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설움을 다섯 살 위인 이복형의 격려로 용기를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집안에서는 그를 대들보라 믿고 희망으로 여겼는데, 결과는 남은 가족들에게 고통과 한만 남기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끝내, 풍족했던 집안은 이복형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이웃들도 상종을 꺼려하는 바람에 모두가 고향을 떠나 버리고 말았으며, 자신도 이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벌써 먹장구름이 항구를 에워싸고 금방이라도 폭우를 뿌릴 것 같다. 많은 배들이 바람을 피해 항구로 돌아오고, 배들마다 선원들은 선구를 정리하며 고물로, 이물로 다니며 단단하게 매워 놓은 밧줄을 확인하느라 부산하다. 이내 바람이 소리를 내고 날이 어둑해진다.바다 물결이 허연 거품을 일으키고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그 때,선주가 부랴부랴 달려와 갑판에 선원들이 보이지 않자 소리를 지른다. 아니,다들 어디 갔어? 칠성호! 아무런 대답이 없다. 칠성호! 칠성호! 그제서야 선장이 선장실에서 나와 배에 오르는 선주를 맞이하지만 못마땅해 하는 모습이다. 좀 전에 다 있더니만.선실에 있는가아? 이 사람, 누구헌티 묻는겨? 출항 안 허니께 그냥 놀러 갔겄지유,뭐. 선장은 관심이 없다는 투다.그도 그럴 것이 요 앞 벌이 때, 돈 한푼 선원들에게 돌아간 게 없으니 선장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잔뜩 불만이었다. 바람 불고 비 온다는디 갑판이랑 이상헌 디 없는가 챙겨야 헐 거 아녀,이 사람들아. 다 알어서 혔겄지유. 선장이라는 사람이 허는 말 허고는. 선주는 혼자 허둥지둥 배를 돌아보다 선실을 들여다본다. 어이,갑판장.다 어디 가고 자네들만 있는 거여? 갑판장은 선실을 나와 깍듯이 선주를 대한다. 나오셨네유.잠깐 바람 쐬러 갔나 본디, 곧 돌아오겄지유. 무사태평이군.아,자네들 눈에는 이 날씨가 안 보이는가? 한석이랑 금방 치울 건 다 치우고, 밧줄도 두어 번 단단히 묶어 놨응게 마음 놓으셔도 되 겄는디유. 영민이 뒤이어 선실에서 나오는 걸 본 선주가, 자네 어디 아퍼? 하며 금방 풀어진 목소리를 낸다. 아닙니다. 내 또 허는 얘기네만,우리 여편네 땜에 내가 한두 번 미치는 줄 아나? 말도 마세.요즘 벌 이도 신통치 않은 데다가 설상가상 겹치기만 허니.딱 한 번만 내 사정 봐 줘.배는 나가야 허지 않겄어? 이윽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필시 쉽게 그칠 비가 아닌 듯,어디를 보아도 트인 하늘은 한 점도 없다. 선주는 선장을 따로 불러,한참 무슨 이야기를 하고는 준비해 온 우산을 받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실제로 요즘 들어 선주가 돈 한푼 내놓지 않는 것은,선주 부인은 몇 년 전부터 서울 강남이라는 곳에 땅이며 아파트며 투기하는 통에 여유 있는 자금은 거의 그 곳으로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선장은 대략 그러한 내막을 알고 있는 터라 선주는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선주는 그에게 무엇인가 선원들을 동요하지 않게 하라는 부탁을 했을 것이라고 갑판장은 생각하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제 선주가 다녀간 것도 혹시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다른 배를 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갑판장의 말이었다. 영민은 그 동안 피신해 있으면서 최소한의 생활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그런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 번만큼은 어머니의 병도 그렇고 해서 돈이 좀 필요하였는데 사정이 그러하니 별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돈이 다소 회전이 되고 할 때는 여유가 있어 배 벌이가 안 되더라도 선원들에게 돌아가는 게 있었지만, 근래 두세 달은 어찌 된 일인지 손에 쥐는 게 거의 없었다. 열 명 되는 선원들은 거의가 제각기 가족을 거느리는 가장들인데 서로들 말도 못 하고 선주의 처분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몇 선원들은 선불을 받고 당장이라도 다른 배를 타고 싶어 했지만,그 동안 밀린 돈이 한두푼이 아닌데 그것을 건지려면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심산이었다.그리고,고생하며 번 돈을 포기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또 선주가 조금만 기다리면 해결해 준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 말만 믿고 눌러 앉을 수밖에 없었다. 곁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영민은 선원들의 처지가 안타깝게만 보였다.그러나,그들처럼 순진한 사람도 세상에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제법 빗발이 거세지며 항구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다. 이런 날씨라면 내일도 출항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선원들의 말을 들으며,영민은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선장의 말을 뿌리치고 배에서 나와 다시 줄포집을 찾았다. 줄포집은 어수선하였다. 모두 항구에 발이 묶인 채라 선원들로 가득찼다. 술 취한 소리로,어쩌다 한 번씩 부르는 노래 소리로 담배 연기 속에 항구의 밤은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같이 깊은 구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또 외상 술인지 빤히 알면서 이렇게 갖다 바치니,나도 미친 년이지. 비에 흠뻑 젖은 영민은 줄포댁이 내미는 수건도 마다하고,줄포댁의 잔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 듯 소주 몇 잔을 거푸 마신다. 다만,옆에서 비우는 술잔을 채워주는 줄포댁이 영민에게는 고마울 뿐이다. 혼자서 또 웬 술여? 영민은 한참을 술잔만 비우다 물끄러미 줄포댁을 쳐다본다. 칠성호 사람들은 색시집도 못 가고 죽을 맛이라며? 그놈에 선주 황 영감은 유명허던디.그 려도 다 참고 배 타는 거 보면 용하기도 혀.아니,선원들 처자식들은 그냥 굶길 작정인가 보 지.자네,젊은 사람이 여기서 무슨 고생여? 대학도 다녔다는디 뭐가 부족혀서 이 고생이냐 말여.경험도 없는 사람이 겁 없이 배 타는 거 보면 대견허긴 허지만,도대체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이 바닥에서 뭐가 나올 거 있다고 바둥바둥대는지 모르겄어.어지간허면 일찍 뜨는 게 좋아.이 몸도 이 바닥에서 남은 건 더러워진 입밖에 없는디. 밤이 되면서, 종일 손님이 따라 주는 술에 거나하게 술기가 오른 줄포댁은 계속 영민을 붙들고 말문이 막히지 않는다. 영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가져 온 소주 병을 비운다. 근디,한 마디도 않고 술만 죽일 거여? 영민도 어느 정도 술 기운에 얼굴이 희미한 형광등 아래 촉촉히 젖어 있다. 영민은 긴 시간을 망설이던 끝에 조용히 이야기를 꺼낸다. 아주머니.실은 낮에도 제가 찾아온 것은 아주머니에게 부탁이 있어서였습니다. 부탁? 뭔디? 몇 번 망설이다 하는 이야깁니다만.. .. 참,속 갑갑허네. 괜찮응게 어서 허드라고,응? 줄포댁은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영민에게 바짝 다가 앉는다. 아주머니... . 마침,주위가 갑자기 떠들석해지자 줄포댁은 큰소리로, 술은 입으로 마시는디 왜 이리 시끄럽고 난리리야? 좀 점잖게 술 마시믄 누가 잡아 간당 가? 하고는 다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영민에게 이야기할 것을 재촉한다. 저한테는 고향에 홀어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 그런디, 무슨 일이라도 생긴겨? 며칠 전 연락을 받았는데, 건강이 안 좋다는... . 올 몇이신디? 내년이면 칠순이십니다. 그렇게 연세가 많으셔? 그럼 무슨 병이라도? 그러믄 후딱 가 봐야겄네. 직접 통화를 못 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아마 고집이 세신 분이라 병원에 가지도 않으시고 곧이곧대로 당신 뜻대로 어디 편찮으셔도 집에만 누워 계실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마흔은 훨씬 넘어서 둔 자식이구만.냉큼 달려가야 헐 거 아녀? 근디 딴 형제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이민 떠나 버리고... . 아무도 없겄네? 그 동안 집에 딸려 있는 가게 월세로 생활 해 오신 거지요.자식이 이 모양이라서요. 영민은 여러 사정을 여기서 더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우선은 급한 게 단 얼마라도 돈을 마련하여 선옥으로 하여금 어머니에게 하루라도 빨리 다녀오게 해서 어머니의 소식을 자세히 알고 싶을 뿐이었다. 돈이 필요허다, 그거지? 아주머니께 믿지도 못할 놈이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게... .빌려주시면 밀린 외상값하고 바 로 갚아 드리겠습니다.몇 달째 밀린 돈이 좀 되거든요. 얼마믄 되는디? 줄포댁은 더 길게 말하지 않고 이내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였다. 겨우 서로 알고 지낸 것이 서너 달인데 자신을 믿고 적잖은 돈을 빌려준다는 줄포댁을 영민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줄포댁은 영민의 눈물을 보았는지, 내일 아침 일찍 수협에 가서 돈을 찾아 준비하겠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영민은 다시 술값을 외상 장부에 올리라는 말을 남기면서, 아주머니,조금 있다 또 올게요.전화 한 통화 하려고요. 라고 덧붙였다. 그 두 번인가 했던 서울에? 예. 영민의 느낌으로는 약간 야릇한 줄포댁의 웃음을 뒤로 하고 줄포집을 나왔다. 점점 밤이 깊어지면서 빗줄기는 가늘어진다.잠시 바람도 잔다. 영민은 비를 맞으면서도 비가 그리 싫지가 않다. 영민은 옷깃을 세우고 어디론가 걷는다. 거리는 가을을 재촉하는 낙엽이 비바람에 떨어져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고,가로등만 인적 없는 빈 거리를 밝히고 있다.길 건너 시계탑은 무겁게 바늘을 끌어 올리고,아직은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긴다. 차 소리도 끊긴 시간,인적이 뜸한 저편에 우산을 받쳐 들고 한가하게 걸어가는 연인인 듯한 두 사람의 모습이 정답다.영민은 엷은 웃음을 짓는다. 선옥이 그립다.선옥이 보고 싶다.빨리 선옥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왜 이리 시간은 더디 가는 건지. 그렇지만,오늘 영민은 무엇보다도 선옥이 그 후의 어머니의 소식을 알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앞서 해야 했다. 영민은 몇 번이나 시계를 보고서야, 이 시간이면 서울에 있는 선옥과 통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그는 걷던 길을 돌아서서 줄포집으로 향하였다.선옥은 졸업 연주 연습으로 저녁 늦게나 들어온다는 것을, 그는 며칠 전에 알았던 것이다. 줄포댁은 손님들 술 시중을 들다가 들어서는 영민을 보고, 시끄러운게 방에 들어가서 혀.방에도 전화가 있응게. 하며 방문을 열어 주었다. 영민은 전화국에 시외 전화을 신청하고,선옥이에게 무슨 말을 먼저 어떻게 할까 궁리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기다리다, 마침 전화 옆에 놓아 둔 줄포댁의 담배 한 개피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얼마만큼 지나자 전화 벨이 울리면서,다행히도 선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오빠? 이상하게 오빠같은 생각이 들어 전화 받았는데.괜찮아.옆에 아무도 없어. 졸업 연주 연습은 잘 되지? 연습 끝내고 이제 막 들어오는 길이야.그런데 전화 왜 이제 한 거야? 바로 한다고 했잖 아.오빠 목소리라도 들어야 안심이 돼.우리가 이렇게 오래 헤어져 있던 적이 없었잖아. 선옥의 반가워하는 목소리는 가늘게 떨린다. 어머니 때문에 전화한 거지,걱정돼서? 김 목사님 말씀으로는 천식이 조금 심하신 것 같다 는 거였어. 어머님과 직접 통화는 할수 없으니까 내가 틈나는 대로 한번 시골에 다녀오 려고 해.가서 직접 뵈어야 어느 정돈지 알지.그리고,시골 지서에서 순경으로 있는,오빠 친 구도 만나 보고 하려고.통화만 해 봤는데,내 이야기 하니까 나를 기억하더라구.긴 이야기는 못 하고 시간 내서 수일 내로 간다고만 했어.곧 만나고 올게.오빠 연락처를 알려 주면 내가 전화해 줄게. 왜, 알려 주면 안 돼? 선옥은 그저 영민으로부터 들은 바대로,서해안의 한 항구 도시에서 야학을 한다는 것과, 전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자주 연락은 힘든다는 것,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저들은 마음만 먹으면 도청할 수도 있어.네가 저들에 알려지면 말야.조심해야지. 알았어,오빠.그런데,혹시 너무 힘든 것 아냐? 내 걱정은 마.그리고, 내일 전화 오전에 받을 수 있니? 내일? ...응. 마침 수업이 오후에만 있어.오빠,우리 졸업 연주하는데 오빠가 와서 보면 참 좋겠다.나 꽃도 주고 하면 좋을 건데. 나도 가고 싶지만, 이렇게 통화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 그래야지.오빠,보고 싶다. 영민은 그 말에 가슴이 찡 울렸다. 이만 끊을게. 응.내일 꼭 전화해. 영민은 수화기를 내리며 아쉬운 마음을 삭였다. 그리고,그는 줄포댁에게 고맙다는 짧은 말 한 마디만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잠시 쉬어가듯 비를 거두고,길 한켠에 서 있는 영민에게 다가와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외롭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항구는 닻을 내리고 꿈을 꾸는데,자신의 여행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인가? 항구의 밤은 늘 그렇게 일찍 오고 있었다. 그는 여태껏 자기의 곁에서 외로움을 달래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지나온 시간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 2 부 긴급조치 일제시대에 영민의 할아버지는 고향인 황해도에서 금광을 하여 수많은 돈을 벌었다.그러나 산 사태로 인해 영민의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갓 결혼한 나이에 영민의 아버지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선친의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을 받게 되었다.영민의 아버지로서는 금광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말만 듣고 사업하다가 얼마 가지 못해 가산을 탕진해 가기에 이르렀고,그로부터 영민의 아버지는 형 영한을 낳고,영민의 어머니를 둔 채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워낙 선친이 벌어 놓은 게 많았는지라,영민의 아버지는 무엇이든 힘든 일은 하지도 않으려 했고,다만 노름과 술과 여자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그 세월이야 영민의 어머니에게는 한숨과 낙망의 연속이었다. 이어서,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의 기를 들고 나라는 해방이 되었다.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영민의 집안은 그나마 남은 재산을 모조리 빼앗기고,살 방도가 없어 고향을 떠나려 작정하던 차에 전쟁이 터졌다.결국 가족들은 중공군에 밀리어 후퇴하는 국방군을 따라 월남하여 결국 서해안 어느 작은 포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영민의 아버지는 상당한 기간 객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허송세월하였고 영민의 어머니는 직접 돈벌이를 나서야 했다. 포구의 돈벌이는 그런 대로 식구들을 굶기지는 않았다.포구에 배들이 들어오면 생선들을 싼 값으로 떼어다가 멀리 도시에까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였다. 영민이 나중에 형을 통하여 들은 말이지만,그 때의 어머니 모습은 언제고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형은 아버지가 집안 살림을 등한시하고 어머니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느낀 게 많았을 것이었다. 형이 늦은 나이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의 노력으로 집도 사고 가게를 얻게 되어,어머니는 행상을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아버지는 마음을 잡았는지 몇 해 동안은 어머니를 옆에서 도우며 그런 대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피난민의 악착같은 기질을 보이며 조금씩 재산을 모아 갔다.동네에는 영민의 집과 같이 피난민이 많은 가구가 있었지만 모두들 나름대로 객지 생활에 정을 붙이고 살아갔다.그리고,북쪽에 두고 온 고향은 그들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돌아갈 날은 아득하게만 느껴져 갔다. 바로 그쯤 해서 영민은 태어났고,아무 부족한 것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해,흐르던 세월 속에 아버지의 검은 그림자가 집안에 다가서고 있었다. 영민도 어린 나이였지만 그 날을 잊지 못하는 것은,한 가정의 생명 같은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영민도 생생히 기억하는 열한 살 나던 해, 어느 겨울 날 저녁이었다. 밖에서 후닥닥하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커다란 남자 서넛이 안방으로 들이닥쳤다.그리고는 가족들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아버지를 붙들고 나가 버렸다.아버지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들을 뿌리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서야 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니는 가게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집 앞에서 끌려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그만 놀라 기운 없이 주저앉아 버렸고, 어머니,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지요? 형이 바로 달려 나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을 잇지 못하고 영민을 끌어안고 울기만 하였다. 얼마 후,형이 돌아와 울면서, 어머니,아버지가 간첩이에요? 라고 소리쳤지만 영민은 그저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어머니만 바라보았다. 뭐? 어머니는 그만 정신을 잃고,형은 소리내어 울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영민의 가족은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소리에 두려움으로 바깥 출입도 하지 못하고 들어앉아 있어야 했다.어머니는 가게 문을 열지 않고 이제나저제나 아버지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그처럼 겨울 밤이 길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러던 어느 눈보라가 밤새 쳐불던 날,아버지는 문 앞에 쓰러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맨발로 달려 나간 어머니는 이웃이 혹시 보거나 들을세라 곧 바로 아버지를 업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뒤따라 나선 영민은 멀리 허연 눈발 속에 사라지는 군용 지프를 바라보고 울음을 터뜨렸고,형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돌아온 아버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몇 날이 가도 아버지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자식들 몰래 안방에서 아버지의 몸을 씻겼다.그 때마다 고문에 시달린 상처를 자식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갈수록 아버지의 시선은 서리 낀 유리창같이 흐려져 갔다. 어머니의 한숨과 숨죽이며 흐느끼는 소리는 긴 겨울 밤,책장을 넘기는 두 자식의 귀를 한참 맴돌고 그 어디론가 싸늘하게 쓰러져 갔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그 지옥 같은 겨울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고문에 시달려 몸을 지탱하기 어려워하던 아버지는 마침내 그 어떤 말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오직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긴 것은 임종시의 눈물뿐이었다.어머니는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 내면서,고향을 떠난 게 죄였다고 통곡하였다. 영민의 가족은 아버지가 왜 연행되어 가고,어떻게 해서 풀려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다만 가족들이 믿는 바 아무런 혐의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풀려 나왔으려니 하고 생각할 뿐,어디에 가서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해야 할지 몰랐다.마음껏 속을 털어 놓고 지낼 친척들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 얼마 전에는 해안 침투 간첩 사건에 몇 사람이 연루되어 누구는 잡혀 들어가고,누구는 풀려 나오는 일이 생기면서 상당한 기간 서로들 피해 다니며 지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으레 사람들은 그래도 힘든 피난 시절 꿈을 사르던 포구를 떠나 다시 또 다른 객지로 이사를 가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포구를 떠나지 않았다.십 수 년을 내 고향이려니 하고 살아왔던 이유가 있었지만,더 큰 이유는 동네 뒷산 기슭 멀리 북녘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아버지의 묘소를 그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듬해,형은 서울 유수의 대학에 합격하여 서울로 떠나고 영민은 중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누군가의 전도로 인근 교회를 나갔다.어머니는 주일마다 교회를 빠뜨리는 적이 없이 열심이었다.아침과 저녁에 기도하는 시간이면 영민은 고개를 숙이고,마음 속 깊이 어머니의 기도를 하나님이 꼭 들어주실 것을 간곡히 기도하곤 하였다. 영민도 곧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왔던 형도 교회에 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서 형은 여자 친구라며 서울에 산다는 여대생을 집에까지 데려 왔고, 어머니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여대생은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집안이 서울에서도 상당한 부자라 하였다. 어머니는 가끔 뒷산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산에 오르면 바다 저 너머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향이 있는 북녘을 향해 기도하면서 늘 무엇인가 마음 속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고향을 두고 온 지도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인가. 어머니는 젊은 시절 그렇게도 아버지에게도 푸대접을 받았으면서,아버지와의 그 고향을 추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믿음의 생활에 어머니는 시간이 흐르면서 평온함이 역력히 얼굴에 드러나 보였다.여러모로 집안은 평안을 되찾아갔다. 거기에는 교회 김 목사의 따뜻한 배려가 컸다. 김 목사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잊지 않았고 영민의 집안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그러니까 그는 영민의 식구들에게 정신적인 지주인 셈이었다. 김 목사도 고향이 이북으로서, 처자식을 전쟁 중에 헤어지고 긴 세월을 처자식을 위해 기도하며 해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동병상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흐르는 세월 속에 어머니는 아버지 없는 쓸쓸한 회갑 잔치를 그런 대로 치렀다. 그러나,그 얼마 뒤 어머니는 또 다른 고통을 맞이해야 했다.그러나 어쩌면 그 고통은 미리 예견된 것인지도 몰랐다. 어떤 장정 두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집안을 뒤지며 형을 찾아내라는 소리를 치며 어머니를 윽박질렀다. 어머니는 수 년 전에 당했던 아버지의 일을 또 한 번 겪으면서도 그 때처럼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는 형이 당국에서 말하는 소위 불순 세력에 가담하고 활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마 어머니는 당신이 사는 이 땅의 권력자들이 정의롭다고는 생각지 않았고, 한편 남편을 분하게 잃고 만 당신이었기에 어느새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일이었다. 적어도 영민에게 보인 어머니의 흔들림 없는 모습은 오랫동안 영민의 뇌리에 남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형은 자원 입대의 형식으로 군에 갔고,영민은 근처 소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통학을 했다. 형이 없는 동안,그 여자 친구는 자가용을 타고 몇 번 집에 다녀갔고 올 때마다 아버지의 묘소를 찾는 것도 잊지 않았다.물론 형이 시킨 일이었겠지만 정성이었다. 영민은 그런 형의 생각과 행동들이 아버지의 기억과 함께 가슴 깊은 어느 한 자리에 마치 커다란 성곽처럼 자리하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하였고,또한 그는 형과의 많은 나이 차이에 언제나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 없는 집안에 형이라는 존재는 그 이상의 어떤 의지가 되었다. 그 즈음에 정가에서는 장기 집권을 기도하려는 음모가 시작되었는데,이름하여 시월 유신이 었다. 전국은 대학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의 시위가 일어나고 최루탄이 터지면서 정국은 사태 수습을 내세워 긴급조치를 발표하였다.그것은 국민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고 구속하는 내용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는 기약 없는 올가미였다. 그 때,영민은 이선옥이라는 여학생을 만나게 되는,어쩌면 그에게는 행운 같은 기회가 다가왔다. 대학 입시 준비에 한창이던 어느 여름 날,교회에서 학생들의 수련회가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이 운명의 만남.영민은 항상 선옥에게 틈만 나면 그 날의 의미를 그렇게 말하곤 하였다. 어머니의 정성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입시 준비에 긴장해 있던 그 즈음,며칠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날의 고요를 깨뜨리고 예배당 문 쪽에 땀을 씻어내리며 나타나던 뽀얀 얼굴빛에 어울어진 단발머리의,그 순하디 순하게 생긴 소녀의 모습은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때,친구의 전도로 처음 교회에 나온 선옥은 예배를 볼 때마다 풍금을 치고 성가대에도 열심이었는데, 영민에게는 선옥의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 예뻐 보였던 것이다. 나이는 세 살 아래였고,학교로는 두 해가 늦은 선옥은 영민을 오빠라 불렀다. 교회 생활을 통해 서로 친근하게 지내다 공교롭게도 다음해, 영민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선옥의 집안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서울 발령이 나고,정말이지 두 사람은 운명처럼 서울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영민은 어머니에게 서울로 가서 함께 살았으면 했지만,어머니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한 일 년 지나면 형도 제대해서 복학할 터인데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자식들을 가르칠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영민은 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지방에서 올라온 조윤호와 강석훈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외 롭지는 않았다.그리고 선옥과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 정해 놓은 약속의 날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곤 하였다. 평온한 서울 생활이 계속되면서 형이 군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형은 남은 한 학기를 마치기 위해 복학을 하였다. 그런데, 영민이 몇 달 동안 형과 함께 생활하면서,자신의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을 겪어야 했다. 형은 졸업과 동시에 바로 그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고,무엇인가 바쁘게 준비하는 것 같더니만 해를 넘기자마자 이민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영민은 자꾸 늙어 가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형은 이미 영민의 가슴 저 깊은 곳에 굳게 자리한 성곽이 아니었다. 며칠을 두고 영민은 우울하였다.그리고 심한 절망에 부딪혀 괴로워하였다. 형은 떠나기 얼마 전,아내와 같이 영민을 찾아와 술을 마시면서 긴 이야기를 꺼냈다. 영민아,내 말 잘 들어라. 너하고 이렇게 얼굴 맞대고 길게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제 너도 다 컸으니까 말이 통하리라 생각한다.나를 용서하고 네 형수 되는 저 사람도 용 서해라.큰아들인 내가 이렇게 너에게 이 땅에 단 한 분뿐인 어머니를 두고 가는 심정 오 죽하겠니? 너는 나를 원망도 하겠지만 별수가 없었다.그래도 난 네가 있다는 게 큰 안심 이 된다.아마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려고 너를 늦게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너도 대학생 이 되었으니까 이해하겠지만,나 사실 아버지의 일을 겪고 얼마 안 되어 독재에 저항하는 조 직에 참여했고 활동도 열심히 했다.그러나 한계를 스스로 절감하게 되었지.권력자 앞에 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나는 단지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지. 영민은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나 같은 놈 취직도 안 되고,사회에 낙인 찍힌 놈이 되어 버린 거야.아버지야 물론 아무런 혐의 없이 끝났지만 바로 그것이 언제 다시 우리 식구들을 얽맬지 모르는 일이다.이 나라 는 그저 숨죽이고 사는 놈만 살 수 있는 세상 같다.이민을 나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만,네 형수 집안에서 손을 썼던 거란다.세상에 태어나서 그래도 한 번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인간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니? 내 먼저 가서 터를 잡아 놓고 어머니와 너를 부르마.이게 다 네 형수 힘이 컸다.밖에선 유신이다 뭐다 해서 어지럽지만,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겠니? 좋은 세상 언젠가 오겠지.어머니께서 가 보고 싶어 하는 고향,물론 내 고향도 거기지만 통 일도 머지않아 오지 않겠니? 넌 아직 데모 같은 것 안 했겠지만 어머니 걱정 끼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도련님,형님 말씀 새겨 들으시고 이해해 주세요.어머님께서는 원래 내색은 잘 하지 않으시 니까 그 깊은 뜻은 잘 모르겠지만, 자식 잘 되는 걸 싫어하실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요? 영민은 이튿날,어머니를 찾아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형 문제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민은 다만, 어머니,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와야 했다. 형은 떠났다. 영민은 형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들을 잊으려 노력하고,이해하려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형 내외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려 애썼고,영민은 학업에 열중하였다. 독서에 빠져 때로는 밤샘도 하고,그 동안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 나갔다.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시골에서 고생하는 어머니의 생각으로 괴로워도 했지만,어머니는 언제나 그의 마음 곁에 기둥처럼 서 있었다. 영민은 형이 남긴 일기장을 우연히 보고 난 뒤부터 형이 방황한 것과 그럴 수밖에 없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영민을 볼 때마다, 영민아, 네가 형을 이해해야 한다. 하는 그 한 마디에 마음을 고쳐 먹기도 하였다. 집안의 일로 하여 가끔 시골에 가면 늘 어머니는 영민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종종 해 주었다. 영민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씩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영민에게 있어 아버지의 그 억울한 죽음을 되새기며 분개해 하기도 했다. 이따금, 영민의 기억 저편에는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들이 그 어린 시절 두려움에 떨던 긴 겨울 밤과 함께 영민의 가슴 한복판에 엄습해 왔다. 게다가 유신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순결한 의지를 지닌 학생들의 시위도 이어지면서, 학내는 걸핏하면 휴강이 되고는 하였다. 영민은 대학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과 학생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많아졌고, 많은 친구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영민은 평상시 관심을 가졌던 민족과 역사의 문제를 자신이 속한 써클 활동에서 진지하게 견해를 펴 나갔고,무엇보다도 자신의 어린 시절 보고 듣고 느꼈던 기억과,특히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한이 그의 생각 한 중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 접근해 갔고,독재 정권을 고발하는 성토의 소리를 들으면서,정의의 상아탑이 맥없이 쓰러지는 현실을 바라보면서,민중의 씨앗을 뿌리는 시인의 절규를 외치면서 영민은,형이 그랬던 것처럼 신선한 지혜와 부끄럼 없는 용기의 칼을 뽑아 들었다.그것은 형의 일기장을 읽고 난 후에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싹이었다. 영민이 바라보는 시대는 혼탁의 길을 내달리고 있었고,그것은 영민을 더욱 절망시켰다. 그로 하여 그는 지하 조직의 울타리에 끼이게 되고, 몸을 던져 독재 앞에 선봉으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책자와 신문을 만들어 밤 이슬을 맞으며 거리에 뿌리고, 독재의 총 앞에 비참하게 구속되어 가는 역사의 지성들을 위해 가진 힘을 다하였다. 결국 영민은 조직의 생활에 분주히 움직이면서 긴 생각 끝에 어머니 몰래 휴학계를 냈다. 그로부터 영민의 생활은 독재에 항거하는 세력들 속에 방법의 차이로 하여 갈등도 하며 계획에 따라 일을 착수하여 한편 성과도 올리고,한편 시행착오도 거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독재에 저항하는 성실한 투사로 길들여져 갔다. 그것은 아버지와 형이 남긴 자신의 숙명이었다. 선옥은 부모와 자신의 뜻대로 음악을 전공하는 여대생이 되었다. 영민은 바로 휴학하여 뜻있는 사람들의 소개로 민주화 실현을 위한 단체에 가담하였고,학칙상 일 년 이상의 휴학이 불가능하여 다시 복학하고 난 뒤, 또 다음 해 휴학을 하였다. 그러나,일들이 계획대로 되지 않고,모였던 사람들도 흩어져 몹시 힘들어 고민하고 방황하던 어느 날,선옥이 영민을 찾아왔다. 오빠,휴학이 너무 길지 않아? 이제 학교는 마쳐야지.그 동안 시간은 군대에 갔다 온 셈 치 고.오빠 군대 문제는 면제로 해결되었으니까 다른 복학생들과 차이도 나지 않을 거 아냐? 오빠의 일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할 수 있고,더구나 학교 공부를 통해 배울 것도 아직 더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그리고 어머니도 생각해야지.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오빠 일로 어머니에게 무관심일 때, 나 몇 번 오빠 집에 들렀어.아직 고향에는 작은집이 있어서 여러 번 다녀왔는데,어머니 말씀은 안 하셔도 그 전 같지 않게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았어. 형님한테서는 예전처럼 소식이 자주 오지 않는가 봐.그리고 오빠,어머니 너무 많이 늙으셨 더라.이웃 사람들 말 들어 보니까 교회에서 기도만 하신대.오빠,누굴 위해 기도하겠어? 영민은 그 때까지 선옥이 그렇게 말을 잘하는지 몰랐다.벌써 선옥은 여자로서의 어떤 모습 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새삼 영민은 의식하며, 그간 자신도 깊게 느끼지 못한 사랑의 싹 이 저 가슴 한 쪽에 돋아 오르는 것을 의식했다. 참,오빠.시골 교회 목사님 생각나? 지금껏 그 교회를 지키고 계시더라. 교회에 가 만나 뵈 었는데 오빠의 사정을 많이 알고 계셨어.서울에 가면 꼭 오빠에게 전하라시면서 어머니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다고.그리고 오빠 하는 일에 용기 잃지 말고,언제나 정의에 서라고 말 씀하셨어.나는 이번에 알았지만 목사님이 여태 그 곳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전쟁 중에 헤어진 처자식 때문이라는 거야.1.4후퇴 직후 그 포구에서 처자식을 우연히 보았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결국 만나지 못한 채,언젠가 그 포구로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 지고 교회를 개척하며 그 곳을 지키신다는 것이었어.얼마나 처자식이 보고 싶었으면 그럴 수 있을까? 오빠도 이제 어머니를 돌아봐야 돼.누구만 믿고 사시겠어? 나도 오빠를 돕고 싶 고,오빠가 하는 일 다 이해하고 있어.우리 아버지는 공무원이잖아.나더러 절대 데모 같은 건 쳐다 보지도 말라 하셨어.요즘 공무원 자녀들에 대한 데모 단속이 심하다면서 나더러 절 대 데모하는 곳엔 가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라셨어.나로 인해 아버지가 피해를 보고 그러 는 것 원하지 않아. 물론 나도 모르는 거 아냐.알 건 다 알아.그렇기 때문에 나도 지금까지 아무 불만이나 불평 한 마디 없이 오빠 곁에 있었던 거 아냐? 그만큼 선옥은 이미 영민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활은 뭘로 하고 있는 거야? 돈도 한푼 없으면서. 어머니껜 죄송한 이야기지만,얼마씩 부쳐 주시는 돈에다가, 뜻이 있는 분들이 도와 주어 그런 대로 생활은 되지.선옥아,난 이 생활에 익숙해 있어.보람도 가지고 있고.누군가 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거야. 사실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나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으니까. 난 단지 오빠의 처지가 안쓰럽고 그게 난 괴롭다는 거야.오빤 어머니가 가엾지 않으셔? 오빠,내년에는 복학해서 남은 일 년 마저 마쳐.학교는 마쳐야 사회에 나가서 뭘 해도 할 수 있을 거 아냐.오늘은 이것만 오빠에게 부탁할게. 그래,네 뜻이 뭔지 알겠다.나도 졸업은 해야지.세상 무엇보다 가장 먼저 우리 어머니에게 한편으로 큰 배신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어찌 되었든 난 형의 부탁도 저버리고 말았으 니까.여전히 자식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항상 마음에 걸려 나는 수도 없 이 갈등을 해 왔어.단지 나는 어머니가 이 자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야. 그 날,영민은 마음 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그 대화는 영민에게 오랜만에 따스한 인정을 느끼게 하였고,선옥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영민은 어머니를 찾았다. 영민은 자신의 마음 저 편을 비켜 간 세월에 눈시울을 적셨고,갑자기 늙어 보이는 어머니에게서 한없는 고독을 절감하였다. 한 해가 넘도록 돌아보지 못한 영민이었기에 그 날은 아버지의 묘소에 올라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겨울 밤 모습을 떠올리며 포구를 거닐었다. 포구는 그의 고향이고 그를 키워 준 곳이었다.그 어느 때보다 그 날의 포구는 영민으로 하여금 포근하게 느껴졌다. 영민은 자신의 자취를 더듬으며 그 동안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시간들을 찾아갔다. 비린내 나는 포구의 기슭으로 늘 떠도는 바람, 바로 그 속에 자신을 길러 온 어머니의 숭고 한 사랑이 그는 다시 한 번 뜨겁게 밀물처럼 밀려 왔다. 어머니의 흔적이 남겨진 포구 어물전 거리며,쪼그린 모습으로 남의 가게 앞에서 갖은 눈치를 받아가며 생선을 펼치고 장사했던 시장이며,영민은 어머니를 잃고 거리를 헤매는 어린애같이 한참을 걸었다. 다음 날,영민은 김 목사를 찾았다. 영민은 김 목사를 통해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안을 터득하였다. 그리고,김 목사와 헤어지면서 김 목사의 손을 붙들고 어머니를 위해 항상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고향에서 돌아온 뒤,영민은 바로 복학 수속을 밟았고 다시 학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단체에서의 활동은 차츰 줄어들고 학업에 정성을 쏟았다.영민은 자기 앞에 다가온 현실에 충실을 기하였다.어쨌든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엄연히 모든 것은 눈 앞의 현실이었다. 어느덧 영민과 선옥은 같은 졸업반이 되었으며,두 사람은 서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그러면서 두 사람에게는, 비로소 서로 가까이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주어졌다.서로가 서로를 진실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래 사랑한다.나는 너를 죽도록 사랑한다. 얼마나 긴 시간의 예비가 필요했던가. 돌아보면 어둡고 가슴 시린 추억들이 그들의 사랑에서 말끔히 부서지고 있었다. 정국은 긴급조치가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학내에는 언제부터인가 경찰이 상주하여 학생들에 대한 감시를 계속하였고,그런 속에서도 독재에 항거하는 정의의 아우성은 하늘을 가르고, 십 수 년 독재의 뿌리를 흔드는 회오리바람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집회나 시위는 긴급조치 위반의 대상이 되어,그런 모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산발적으로 독재를 규탄하며 유인물을 뿌리기도 하고,또한 처절하게 외치기도 하였다.그리하여 더러는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일부 뜻있는 교수들도 학생들의 용기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학생들이 자리하는 이른바 학습의 모임에서도 독재의 부정을 성토하였다. 그런 가운데,당시 보기 드물었던 비교적 큰 모임이 비밀리에 있었던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누군가 영민을 학생과에서 찾는다는 연락을 해 주었고,영민은 별 생각없이 학생과에 찾아갔다. 그런데,평소 안면이 있는 직원이 영민을 한쪽으로 데려가,경찰의 서울 시내 대학 시위 관련자 명단에 박영민이라는 이름이 올라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면서 예사로운 상황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는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영민은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답답하기만 하였다. 자신의 주위에 프락치가 있었던 것일까.자신이 가담한 단체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명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분간이 서지 않았다. 피신한 지 세 달이나 지난 뒤에야 선옥을 통해 알았지만 그건 너무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수사 기관이 해당 시위 사건을 수사하면서 수배자 명부를 작성하던 중,마침 영민이 복학하기 전 참여한 비합법 단체의 명단이 입수되었는데, 집회 관련자와 입수된 명단을 대조 분석하는 과정에서 가명 명단을 추적하다가 영민이 집회 관련자들과 과거에 관계를 가졌던 것이 드러나 결국 집회 배후 조종의 혐의가 짙다는 담당 수사관의 사료가 첨부되면서 수배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시골 지서에 근무하는 영민의 고향 친구인 정 순경이 서울에서 조사차 내려온 경찰로부터 대충 들은 이야기로 영민의 어머니에게 알려졌고, 그것을 선옥이 집안 일로 시골에 다녀오다 영민의 어머니에게서 알게 된 것이었다. 급기야, 영민은 쫓기는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에겐 아무 연락 없이, 선옥에게만 쪽지 하나만 남기고 서울을 떠나야 했다. <선옥아,연락을 못 해도 기다리지 마.틈 나면 어머니 한번 찾아 뵙고. 영민.> 그것은 영민에게 있어서,얼굴을 보이지 않고 숨어 있는 권력과의 싸움의 시작이었다. 이젠 자신 혼자만이 감당해야 하는,정말 외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 아버지가 그 힘에 의해 죽었고,어머니는 한 맺힌 삶으로 살아 왔고,형도 싸우다 지친 나머지 이 땅을 버렸다. 영민은 맨몸으로 집을 나섰다. 친구 석훈의 집을 찾아가고,초임으로 산간 벽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 윤호도 찾아갔다.그러나 자신의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없었다. 그들은 한때 학교를 다니며 서울의 객지 생활에 낯설어할 때 자취하면서 만난 친구들이어서 서로 터 놓고 이야기도 할 사이이긴 하였지만, 상당한 기간을 기댈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영민은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성실히 살아가는 윤호의 모습이 새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다.그리고,그는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았다.그만큼 그는 지쳐 있었고,주위의 것들이 그를 옭아매고 있음에 그는 착잡해 하였다. 그러나,이런 긴급조치 상황에서 자진 출두하여 모든 사실을 밝혀 내기에는 너무 복잡한 일이 되어 버렸다.정치 세력이 반독재 운동의 활동을 차단하고,독재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용공으로 몰아 세워,국민에게 자신들의 정권 연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영민과 같은 사람들을 정치에 이용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고 마는 행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경찰이 수사하면서,자신의 혐의가 풀려 어쩌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영민이 생각 끝에 피신하여 발을 디딘 곳은 서해안의 어느 항구 도시였다. 배를 타면, 물론 경험이 없어 힘이야 들겠지만 상당한 기간은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자신이 낳고 성장한 곳이 포구였는지라,어려서부터 물가에서 수영을 익혔고,뱃사람들을 보아 왔으며,그들의 일거리도 낯설지 않게 생각되었던 때문이었다. 또,선원 부족으로 많은 배들이 선원 구하기에 고충을 겪고 있어서 영민은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매사 뜻대로 순탄하지는 않았다. 출항할 때마다 해당 기관에 승선자 명부를 제출해야 하고, 관할 파출소에서 경찰이 직접 나와서 승선자 명부를 대조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임검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첫 출항하는 이틀 전 날,갑판장이 무슨 눈치를 차렸는지 영민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네 바다에 나가는 거 처음일 텐디 아무렇지 않나? 수영은 허구? 배멀미는 안 허지? 영민은 우선 자기에게 호의를 보이는 갑판장이 고마웠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행동이나 몸짓이 어설프게 보였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저,한석이,자네 혹시 무슨 사정 같은 거 있어서 배 타는 거 아니지? 영민은 자신도 모르게 움칫했다. 영민은 이 곳에 와서 김한석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했는데 금방 적응이 안 되었고,처음에는 갑판장이 무슨 짐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던 것이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응게 허는 소린디,사정 있으믄 얘기허는 게 좋네.나중에 서로 다치 고 허믄 되겄어? 갑판장과의 대화로 영민은 일부 자신의 처지를 밝히고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갑판장은 자기가 나서 선주에게 부탁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영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하여,마침내 영민은 갑판장의 도움으로 선주가 적당히 손을 써서 관할 기관의 임검 절차 없이 배에 오를 수 있었다.이를테면 승선자 명부에 없는 선원인 것이었다. 그로 하여 무사히 영민은 선원 생활이 시작되었고,여러 동료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뱃일에 적응해 갔다.영민은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대하며 하루 하루 성실히 노력하였다.언제까지 피신해야 할지 막연한 처지에서 일자리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는 무엇이든 열심히 일을 배웠다.나이가 가장 어린 때문에 궂은 일은 먼저 했고, 남의 입에 오르는 잘못은 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처음으로 노동의 참맛을 만끽하면서, 이대로 한 세상을 산다 해도 그렇게 싫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우선 바다에 나가면 그 어떤 것에도 구속을 받지 않아서 즐거웠고 작업에 몰두하면 잡념들이 사라져서 좋았다. 여러 차례 출어를 하면서, 갑자기 폭풍을 만나거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당황한 적도 있었지만,몇 달 동안 이런 저런 경험으로 영민은 자신이 정말 뱃사람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손에 일이 잡히어 갔다. 그러다가 영민은 세 달이나 지난 뒤에야 선옥에게 전화를 통해,서해안의 한 항구 도시에서 야학을 하며 친구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알렸고,선옥이 한 번 다녀가고 싶다는 말에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이해하라는 말로 겨우 진정시켰다. 그 전화도,혹시 수사 기관이 선옥을 찾아내어 선옥으로 하여금 자신의 거처를 알려고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의 도청을 의식하여,마침 폭풍을 만나 어떤 항구에 대피해 있을 때 한 것이었다. 그 뒤로 다시 세 달이 지나면서 선옥과 한 번 통화를 하였을 뿐 고향이나 친구에게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았다.다행히 선옥으로부터 자기의 주변에 별 다른 일이 없다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안심이 되어,이 번에도 입항하자마자 선옥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졌다는 이야기였다. 제 3 부 출항 비바람은 밤새 그칠 줄 몰랐다. 라디오에서는 해상의 폭풍주의보 발령 중임을 계속 알렸지만 아침이 되면서 다시 고요해졌다. 영민은 지난 밤을 술기운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때 괜찮은겨? 언제나 부지런하여 일찌감치 일어나는 갑판장이 배 청소를 하다가 선실을 나오는 영민에게 말을 붙인다. 예. 저녁 물엔 출어헐 수 있을 거 같은디.마음 준비혀. 영민은 갑판장의 일을 거든다. 형님,오늘 우체국에 좀 갖다 와야겠어요. 우체국? 어머니께 가 보진 못하고. 서울에 있는 선옥이에게 송금해서 어머니께 한 번 다녀오라고 해야 그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돈은 있어? 어제 줄포댁이 돈 빌려준다고 했거든요. 줄포댁이? 아니 그 여편네가 웬일이여? 자네헌티 돈까지 빌려주고.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겄네. 영민은 씩 웃기만 한다. 그 줄포댁, 외상 술 값 땜에 맨날 죽는 소리혀도 모아 놓은 돈 좀 있는개벼? 실지로 줄포 댁 참 좋은 사람여.이 바닥에서 먹고 살랑게,좀 거칠게 함부로 말도 허고 허지만,그만한 사 람도 없지.색시 안 두고 장사하믄서 뭐라 허는지 알어? 뱃사람들 돈 벌어 먹으믄 죄짓는 거 라,이거여.고생혀서 번 돈 색시 있는 술집에 갖다 바치지 말고 줄포집에 오라 그거지. 제 뜻을 순수하게 받아 준 것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른 선원들이 선실 밖으로 나오며 기지개도 펴고,고물에 가서 소변을 본다.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신 기관장은 벌건 눈을 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화장에게 크게 소리 친다. 야,속 쓰린디 뭐 시원헌 거 좀 없냐? 그렇지 아녀도 준비허고 있구먼유.어서 세수들이나 허세유. 화장의 대답을 들은 기관장은 이 번에는 영민을 향해 퉁명스럽게, 어이,한석이 자네는 어제 왜 빠졌어? 말을 던지자 영민은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언뜻 술자리일 것이라는 가늠으로 적당히 받아 넘긴다. 예.좀 속이 안 좋아서... . 갈 데도 없었을 텐데 어찌 안 보여서... . 마침 선장이 술이 채 덜 깬 모습으로 선실을 나오자 기관장은 선장에게, 형님도 인자 몸 다 버렸슈.겨우 그것 가지고 그 모양유? 영민은 다시 갑판장에게 말을 건넨다. 어제 제가 돌아와 보니까 안 보이시던데, 어디 가셨어요? 선장이 나가자길래 따라나섰더니,색시집이드랑게.진탕 마시고 왔지.와서 본게 자네 자고 있드만. 이어서 갑판장은, 선주가 다음엔 꼭 그간 밀린 거 죄다 해결혀 준댔응게, 이 번에 만선혀서 목돈 한번 만져 보고 허드라고. 하다가 누가 들을까 봐 주위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춘다. 줄포댁헌티 돈 빌리믄 다음 번에 꼭 갚어야지. 그래야죠. 만선 헐라믄 어장이 좋아야 헐 턴디... . 갑판장은 한편 어딘가 모르게 걱정어린 얼굴이다.하긴 살림이 궁한데다가 몇 번씩 빈 손으로 집에 다녀오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언뜻 영민은 갑판장의 작은 한숨을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이 구름떼를 몰고 뭍으로 흘러간다. 일찍부터 나온 선주는 오늘 저녁 물에 출항해야 한다며 준비를 독려하고 들어갔다. 영민은 늦은 아침을 먹고 시간을 재어서 잰걸음으로 줄포집을 향하였다. 영민이 막 줄포집에 이르는데,어디를 갔다 오는지 줄포댁이 먼저 영민을 발견하고, 내 정신 좀 봐.깜빡혔네.내 들어가,통장 가지고 가서 얼른 댕겨올 텐게 들어가 기다려, 응? 꺼칠한 얼굴로 허둥지둥대며 서두른다. 수협이 바로 이 앞인게,잠깐이믄 돼. 죄송해서 어떡하죠?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하세요. 이거,마음 한번 쓸랑게 어찌 마음대로 안 돼서 미안헌디. 괜찮아요.참,저 서울에 전화 한 번 더 해야겠는데... . 허고 있어. 좀 기다리믄 금방 올 텐게. 영민은 송금을 한다는 연락을 선옥에게 먼저 알려야 했다. 전화를 신청하고 얼마 지나 바로 신호가 갔다. 바로 선옥이 나왔다. 난데,다름이 아니라,너한테 송금하려고.시골 가면 어머니 한번 병원에 모시고 가 봐.얼마 안 되지만 네 집으로 보낼게. 오빠,돈도 벌어? 나한테 있는 걸로 해도 되는데.렛슨 아르바이트한 것 돈 있어.그냥 오빠 나 쓰고 싶은 거 쓰고 해.어머니께는 오빠가 보냈다고 할게. 아니야.고맙지만,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그리고 가면 꼭 김 목사님 뵙고. 알았어.정 순경이라는 오빠 친구도 보고 올게. 그래.이만 끊어야겠어.다음엔 당분간 전화 못할 것 같아.솔직히 우체국까지 한 번 나오기 가 좀 멀거든.내 걱정하지 말고. 너, 시골 다녀 온 뒤쯤 해서 전화할게. 그래. 영민은 적어도 보름은 더 되어야 통화할 수 있다는 아쉬움으로 수화기를 내려 놓는다. 그러나,무거운 마음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영민은 벽에 걸린 달력 앞으로 다가가 달력을 한 장씩 넘겨 본다. 지나간 몇 달간의 날짜들은 변함없이 늘어서 있고,가슴 조이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애썼던 순간들이 되살아난다.불현듯 한시라도 빨리 출항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그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 달려들어 덮을 것 같다. 아무런 친분도 없는 줄포댁에게 신세를 지고,갑자기 두려움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 기나긴 여행은 도대체 언제 끝을 맺는 걸까.그리고 그 끝은 어디인가.나의 본 이름도 버리고,정말 난 이대로 죄인인가.정말 난 이대로 수배자인가. 영민은 어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담배를 꺼내 피운다.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담배 연기 사이로 스쳐가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들.내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 혼자 여기 이렇게 어느 구석진 항구에서 슬프게 떨고 있는 것일까. 영민은 방안을 휘둘러보고 잠시 어제 보았던 그대로라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면서 줄포댁이 어제 밤 어디서 자고 왔을까 하는 괜한 생각을 해 본다. 가게는 청소도 되어 있지 않고, 어제 술상들이 치워지지 않은 대로 흩어져 있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채, 가녀린 목숨 하나 움켜쥐고 그녀의 외로움이 가슴 한 구석에 아픔으로 박힌다. 남편은 있을까.자식도 있을까.그녀를 부르는 이름대로 고향은 정말 줄포일까.그리고,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지금껏 보였던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기운 없고 쓸쓸하였는데.아니,그건 착각일 수도 있지.어쩌면 누구도 모르는 어떤 즐거움 같은 것이 있어 그렇게 살 수도 있을 거야.무언가 얻는 것이 있고, 희망이 있어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선입관에 그저 쉽게 본 게 나의 실수야.우선 나에겐 당장 은혜를 베푸는 천사가 아닌가. 영민은 속으로 거듭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담배불을 비벼 끄는데, 줄포댁이 숨가쁘게 들어선다. 자,여기.얼른,우체국에 갔다 와야지. 영민은 줄포댁의 손을 붙들고 몸을 숙여 고마워한다. 아주머니,이번 배 나갔다 오면 꼭 갚겠습니다. 알았응게,얼른 송금혀야지. 영민은 우체국에 들러 송금을 하고 곧 바로 배에 올랐다. 시내 거리에 나가면 늘 그랬듯이 불안한 마음에 쫓기듯 걸었다. 처음보다야 나아졌지만 그래도 배에 올라야 편안하였다. 바다에 나가서도 이따금 순시하는 경비정을 만나면 불안하였지만, 관할 해양 기관선에 평소 안면이 많은 선장의 그럴 듯한 처세와 능숙한 말 솜씨로 적당히 넘어갔을 수 있었다.그럴 때면 영민은 속으로 치안 행정의 허술함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안도의 긴 숨을 내쉬었다. 사실,사람들이 생활이 좀 나아지니까 어려운 일을 하지 않아 배를 탈 선원은 줄고, 심지어는 선장이나 기관사도 제때에 구하지 못해 면허 없는 사람을 승선시켜 출어를 해야 할 정도니 그럴만도 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언젠가 다른 배가 가출한 미성년자를 승선시켜 나중에 그 부모가 수소문으로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이 곳은 아직까지도 사회로부터 버려진 사각지대로 인식이 되어 있고,인권이 유린되는 일이 허다했다.영민도 처음에는 그런 것을 경험하고 옆에서 바라볼 때는 그저 답답하고 우울하기만 하였다. 상당한 경우,출어해서 일어나는 해상 사고나 사건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주위의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선내의 폭력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이나 실종 사건도 안 전 사고로 처리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영민도 배를 타면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소한 다툼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 선원들이 단합하여 실종으로 처리한다 해도 별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실제로 작업 중의 안전 사고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야간에 술이 취하면 배에서 실족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럴 법도 하였다. 항상 그렇게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영민은 자신이 단지 생계 수단을 위해 배를 타야 한다면 아마 거부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영민은 다시 한 번 주위의 선원들을 지켜 보면서,하지만 그 속에서도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들의 삶을 통하여 새삼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또한,영민은 산다는 것에 대해 깊은 애착을 오늘처럼 깊게 느낀 적은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선원들은 어제 다 하지 못하고 미룬 그물 손질을 막 끝내는 판이었다. 영민은 같이 일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제가 좀 늦었습니다. 하며 마무리를 거들었다.다행히 기관을 확인하기 위해 기관실에 들어간 기관장이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안심이 되었다. 영민은 왜 기관장이 신경이 쓰이는지 자신도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아무쪼록 그 동안 언행에 주의를 해 왔지만, 영민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무슨 감정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갑판장은 기관장이 원래 그런 성격이니 이해하라면서, 본심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아무튼 자신에게는 작지 않은 짐이었다. 다만,영민은 언제 한번 기관장과 술자리를 같이 해서 서로 속을 터 놓고 대화를 했으면 하는 마음만 갖고 있는 참이었다. 내킨 김에 이번 출어에는 꼭 시간을 내서 자리를 마련해야지. 갈수록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이 한편 못마땅하기도 했지만,영민은 그런 심경의 변화가 그저 타인에 대한 관대해짐일 것이라고 위안하였다.또,한편으로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성숙해 가는 증거가 아닌가 했다. 저녁 물에 배는 얼음을 싣고 출항하였다. 또 보름 정도의 바다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선장,만선 한번 해야지.술은 조금만 먹구,조심들 혀.무선국에 일 있으믄 연락허고. 선주의 간곡한 당부를 몇 번이고 들으면서 배는 항구를 떠나 바다로 키를 돌렸다.선원들 모두 기운을 내며,서로 만선을 외쳤다.뭍에서는 볼 수 없는 기운들이 저마다 불끈 솟구쳤다. 역시 뱃사람은 바다를 만나야 삶의 의욕이 솟는 것일까.아니,그들은 가끔 당하는 폭풍이나 암초 같은 의외의 상황에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그리 항거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적어도 영민 자신에게는. 영민은 멀어져 가는 항구를 바라보다 퍼뜩 줄포댁이 떠올랐다. 고마운 사람.외상 술이나 마시는,별로 미덥지도 않은 사람에게 선뜻 큰 돈을 내놓은 마음이 그저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이대로 떠나가 훌쩍 어느 섬에서 내리거나 하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사람인데.어찌 보면 그녀에게는 생명 같은 피나는 돈일 수도 있는데.출항 전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바다는 어둠이 내리면서 파도는 더욱 크게 뱃전에 부서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선단을 쫓아 무리 속에 끼었지만 한 이틀 동안 고기 떼는 보이지 않았다. 계속 날씨는 어로 작업하기에 적격이었지만 좀처럼 기회는 다가오지 않았다. 선단을 빠져나와 자리를 옮기면서 지나가는 배들에 물어도 시원찮은 대답뿐이었다. 이대로라면 만선은커녕 다음 출어 준비하기에도 어려울 것이라며 선원들은 초조한 빛이 역력하였다.그물을 던지면서도 헛일이 아닌가 하고 투덜대는 선원도 있고,빈 그물을 올릴 때는 한숨들이었다.더러는 며칠째 술로 보내기도 하고,집안 살림을 걱정하며 푸념만 늘어놓았다. 영민도 줄포댁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낭패라는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영민은 초조한 마음에 버릇처럼 라디오를 찾았다. 배를 타던 처음부터 그랬지만,영민은 라디오를 듣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작업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곤하여 낮에도 자다 보면,아무래도 뉴스를 작정하고 들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떨어져 나와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잊고 산다는 것이 참기에 힘이 겨웠다.그러나 서서히 그 자리에 단련이 되면서 오히려 홀가분한 생각이 들었고,우선 한때지만 영민은 자신이 수배자라는 의식을 버릴 수 있어서 좋았다.바로 그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도피자라는 정신적 고통을 잊게 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별 거부감 없이 둔감할 수 있구나 하는 인식이,영민에게는 한편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거의 바다에서 지내는 속에 세상 소식을 자세히 접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고,뉴스라도 들을려고 시간을 잴라치면 기관장은 한결같이, 세상 끊고 살어,이 사람아. 하면서 다른 선원에게,흘러간 노래가 나오는 방송으로 돌리라고 야단이었다. 물론 다른 선원들도 흘러간 노래를 들으면서 장기나 바둑을 두는 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낙이었으니까.물론 거기에 술을 곁들이면 더욱 좋았고. 고기떼를 기다리는 일은 무작정 계속되었다. 시간이 멈춰 선 듯한 바다는 고요하기만 하였다. 닻을 내리고 다시 그물을 던져 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선원들은 한 마디씩 내뱉었다. 사릿물이 끝나가는디. 오늘이 다섯 물이지유? 어찌, 징조가 그런디유. 사람들 성급허긴, 이러다가도 한번 떴다 허믄 주체 못 혀어,이 사람들아. 어장 잡는 것도 순서가 있는 건디. 진드근히 버텨 봐.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여? 어디 섬 바람 좀 쐬고 싶지 않아유? 돈이나 주고 술 먹어야지. 빈 털털이 주제에. 섬 술집마다 외상 장부 하나씩 만든 게 누군디? 벌써 언제적 얘긴지 모르겄네유. 근디,그 때는 바다에 나왔다 허믄 만선이었지유? 형님. 참으로 쌍팔 년 때 얘기네요이. 어느새 화제는 과거로 돌아가고,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밤이 다시 바다 위로 나린다.선원들은 다시 그물을 던져 놓고 선실로 들어가고 갑판은 조용하다. 별이 총총하다.별이 아름다운 것은 어둠이라는 동반자가 있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배의 등불이 멀리서부터 수면을 가르고 떠 있다.고독한 빛들이다. 선원들은 모두 선실로 들어간 뒤,영민은 이물 한쪽에 걸터앉아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대중가요 가사가 참 속절없다고 느낀다. 포근하다 할 만큼 적막하다.나 하나만의 시간.이것이 진정한 자유인지도 모른다.만끽하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그러다,갑자기 무서운 외로움에 빠지고 만다. 세상으로부터 까마득히 떨어져 나와 혼자 있는 불안에 휘감긴다. 배를 때리는 물소리만 정적을 깨고,어디론가 흘러 들어가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가슴을 죄어 온다.어머니의 그늘진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돌아가신 아버지는 이제는 좀 멀어진 듯 희미한 기억 속에 아직도 초췌한 모습으로 떨고 있다.그 눈보라치던 밤의 공포처럼 무언가 내 뺨을 후리치고 스쳐간다. 여기 이 자리 살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나는 살아 있는 건가. 어이,한석이 어디 있나? 선실 쪽에서 나와 누군가 영민을 찾았다. 거기 있었군.자네와 술 한 잔 하려고. 기관장이 술을 마셨는지,걸음을 약간 뒤뚱거리며 영민에게로 다가왔다. 기관을 끄고 닻을 내린 상태니까, 영민은 기관장이 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영민은 그렇지 않아도 이 번엔 마음 먹고 기관장과 함께 이야기를 했으면 하였는데,먼저 기관장이 술을 들고 나타나니 마침 잘 된 일이었다. 영민은, 기관장님,이 곳도 시원찮으면 내일 일찍 배를 옮긴댔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기관장을 붙들어 앞에 앉게 한다. 뱃사람으로 이십 년인데, 내 걱정 말고.자, 한 잔 받지. 예. 기관장은 가지고 온 사발을 내밀며 소주를 가득 채운다. 자네 말야,뱃사람과 술은 어떤 관곈지 아나? 그것도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술은 뱃사람들 보약야,이 친구야. 보약요? 뱃사람 일 시키는 건 술의 힘이다,이거야.이렇게 좋은 이 보약을 놔 두고 안 먹으면 병이 되고 마는 거지. 기관장님도,보약도 적당히 드셔야지,너무 드시면 더 큰 병 되는 건 왜 모르세요? 어? 그렇군. 기관장은 껄껄 웃는다. 역시 자넨 현명한 친구야.자,그런 의미에서 잔 비우게. 영민은 여느 때 같지 않게 사설을 늘어 놓는 기관장에 대해 혹,어떤 흑심을 숨기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긴장도 하였지만,갈수록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자네, 솔직히 내가 못마땅하고 싫었지? 아무려면 못마땅하기까지야 했겠습니까? 난 원래 괴팍한 성질이지.이렇게 이야기하고 지내다 보면 나에 대해서 알고 그러면 그러려 니 할 거야. 성질이야 누구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기관장님 웬일이세요? 저한테 이렇게 술 까지 따라 주시고. 실은 출항하던 전 날 밤에 술집에서 이야기할까 했는데, 자네가 안 와서 그만 못 했지. 무슨 말씀이신데요? 영민은 기관장에게 자연스럽게 대하는 자신을 의식하며, 지나간 다섯 달 이상 왜 그리 기관장을 어렵게 느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자네 배 타는데 숙달됐으니까 하는 얘기네.괜히 나 혼자 잔소리하고 퉁명스럽게 대한 건 사실,자네 긴장하게 하기 위해서였네.정신 들게 하기 위한 거였다는 걸세.배라는 것을 그저 아무나 가볍게 타는 생각을 가질 것 같았고,자네의 피신에 대해서도 항상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 단단히 가지게 하려는 내 생각이었네. 배를 타는 것도 자칫 긴장 을 풀면, 경험 없는 자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고.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거야.그러나,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런 사고나 사건이 생기면 경찰 수사에서 승선자 명부에 오르지 않은 자네가 문제가 되면 큰일 아닌가? 영민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관장에 대한 그간의 감정을 풀 수 있었고,자신의 옹 졸함이 기관장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고마움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기관장은 영민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 동안 못 한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기관장은 갑판장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고,선원 생활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쩐지 그는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서로 술을 주고받고 서로 상당히 취기가 올랐다. 바다 위의 술맛은 달콤하였다. 영민은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기관장이 자기에게 한 말 중에 갑자기 그 의도가 궁금한 것이 있어 알고 싶은 생각으로 물었다. 기관장님,그런데 왜 저에게만 유달리 세상 끊고,살라 그러시는 겁니까? 물론 제 처지가 그 래서 그렇지만.무슨 뜻으로 하셨는지.항상 그렇게 하시길래... 아니,거기에 무슨 뜻은.내 짤막한 생각으로 뱉는 말인데 별 뜻 없어.단지 하나 싶은 것은 자네, 악착같이 이 세상 위해 소리지르고 일 하고 해도 결국 자네 버리는 세상 아닌가? 바 로 그 세상에 무슨 애정이나 미련 같은 거 가지고 있나? 그 말을 끝내고는 기관장은 마저 남은 술을 다 비웠다. 영민은 술 기운에 그냥 스칠 수 있는 기관장의 말에서 언뜻 잠시 잊고 있던 형의 얼룩진 이민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그 그림자가 밤을 드리우고 혼미한 정신의 한 자리를 파고 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실수였다.선택은 어차피 했어야 하였는데, 그 시기를 놓치고 여기 이렇게 바다에 길을 잃고 누워 있는 것이다.그야말로 이제는 그 어디에도 발을 디디지 못하는, 바다에 둥둥 떠 있어야만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다.그래서,저 바다 너머 세상에 애정과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이,갑판장! 어서 전부 나와 봐! 빨리! 영민은 잠결에 정신을 차렸다. 지난 밤 술에 머리가 무거움을 채 느끼기 전에,밖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란한 소리가 필시 무언가 일이 일어난 듯하였다.영민은 재빠르게 뛰쳐 나갔다. 자,끌어올려! 서둘러! 그물 조심허구. 이거 만선헐 거 같은디유. 고기들이 죄다 굵고 좋구만. 선주 얼굴이 빤히 보이는디유. 영민은 이렇게 선원들의 입에서 절로 노래가 나오고 흥에 겨워하는 광경을 자신이 배를 탄후로 처음인 듯하였다. 그렇게 고대하였던 고기떼가 바로,닻을 내리고 서 있는 그 자리로 흐르고 있었다니.선원들은 더욱 힘이 솟구쳤다. 그리고,어디서 나타났는지 갈매기떼가 벌써 배 위를 선회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물을 끌어 올리는 기계 소리는 아침 바다를 진동시켰다. 영민은,우선 회항하면 당장 줄포댁의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신이 날 일이었다. 영민의 시선에 들어오는 선원들의 환한 웃음의 몸짓. 이른 아침 햇살 속에 더없이 눈이 부셨다. 순간,영민은 이상하게도 짙게 검푸른 바다에 그만,자신의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 4 부 고향 긴급조치는 계속되고 있었다. 진정되어 가는 학내의 분위기에 선옥은 이대로 정국이 안정이 되었으면 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지면서 다시 주변은 술렁거렸다. 경상도 몇 지역에서부터 급기야 난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신문마다 시국 사범들의 연행과 구속을 보도하였다. 선옥은 갈수록 초조하였다.한 번씩 관계되는 내용을 알리는 신문과 방송에, 영민의 이름이 없을 때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붙잡혀 가면 가족조차도 모르는 일이 많았던 터라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옥은 영민이 송금하면서 보낸 겉봉투의 주소를 보고 한번 찾아갈 생각도 해 보았지만,그것도 영민이 사실대로 주소를 기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과 어는 지역의 이름만 알아 가지고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판단에 도리없이 포기해야 했다. 선옥은 보름 뒤에나 다시 전화하겠다는 영민의 말만 믿고,그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면서도 그녀는 영민이 무심하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였다.본인도 뻔히 이런 시국을 알고 있을 텐데.그러면 어머니도 걱정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사람이 연락을 끊고 있다니.아니, 도청 때문에 전화를 하고 싶어도 못 하고 있을 거야.그저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리하여,선옥은 시골 지서에 근무하는 영민의 고향 친구인 정 순경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더 이상 알 수 있는 정보는 없었고 단지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만 하였다. 선옥의 졸업 연주 날짜는 하루 하루 다가왔다.연습에 열중하면서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학교 생활에 충실하며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가지려 노력하였다. 요 며칠 내내 외출에 돌아오면 성옥은 맨 먼저 식구들에게 전화 온 것이 없냐고 묻는 일이 아주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런 선옥을 보고 그녀의 어머니는 영민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기 때문에 별다른 이야기는 직접 하지 않았지만,선옥이 너무 영민에게 매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무겁고 썩 내키지 않아 불안하였다.시골에서 알고 지낸 영민의 어머니를 보면 그냥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오래 전부터 단지 서로 깊은 관계가 아니기만을 조심스럽게 바라고 있는 참이었다. 처음엔 선옥의 집안에서도 영민과의 교제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영민이 휴학을 하고 난 뒤부터 그의 행실이 마땅치 않게 여긴 나머지 그녀의 아버지가 몇 번 영민을 걱정하면서 선옥에게 긴 이야기를 하였었다. 얘야,한 번씩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을 겪을 수 있다.나도 그런 정도는 충분히 이해 한다.그렇지만 거기에 목숨을 걸다시피 해서 젊은 시절을 공부는 하지 못하고 시간을 뺏기 면 결국 어떻게 되겠니? 불 보듯 뻔한 것 아니냐? 네가 옆에서 그 동안 고향 오빠로 잘 따 르고 했으니까 진지한 대화를 한번 해서 제발 학업을 중단하는 일은 안 된다고 설득을 해 봐라.영민이가 네 말을 들을 수도 있잖니? 그 영한인가 하는 영민이의 형도 적응하지 못하 고 미국으로 떠난 것 아니냐? 바로 앞에서 그렇게 보고 당한 사람이 다시 또 그걸 그대로 반복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그리고,너도 수모를 겪어야 될지 모르는 문제야,이 건. 그 때 선옥은 대학 생활을 막 시작할 즈음이었고,영민은 한참 재야 단체에서 일을 돕고 있던 터라 선옥이 어떤 말을 하여도 영민에게는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오히려, 선옥은 그러 한 영민이 믿음직스럽고 한 시대의 방관자가 아닌 민주의 횃불을 든 진정 용기 있는 자로 보 고 있을 때였다. 하기는,시간이 흐르고 나중에 선옥의 설득으로 시작되어 어머니의 처지라든가 여러 주위의 여건에 의해 영민이 깨닫고 결심하여 영민의 복학은 이루어졌지만,이제 선옥이 졸업을 앞두고 결혼을 생각해야야 할 시점이 되고 보니, 선옥의 집안은 영민과의 관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선옥의 부모 생각으로는 영민의 처지가 그러하니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결혼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옥아,너 이대로 영민이에게 매어만 있을 거니? 그 정도면 되었어. 졸업하면 시집갈 네 가 지금 그럴 경황이 어디 있어? 아버지나 나나 원하지 않는다.졸업 연주 준비는 잘 되는 거지? 만약 영민이 신경 쓰느라 망치면 안 된다.다시 하는 이야기지만 졸업하면 바로 선보 고 시집가는 줄 알아.하나하나 준비하고 있으니까.졸업하면 순위 고사고 뭐고 결혼 하는 줄 알란 말야. 선옥의 어머니는 시간나는 대로 졸업과 함께 결혼한다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였다.그것만이 선옥이 영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선옥은, 엄마,엄마는 딸이 꼭 하고 싶은 걸 막을 생각이야? 난 음악 선생이 원래 꿈이었어.엄마도 알잖아.그런데 그걸 엄마가 막으면 돼? 엄마도 그러라고 나 음대 보낸 거 아니냐구.아빠도 마찬가진데 왜 막는 거야? 엄마,내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이야? 곧 바로 반기를 들었다. 그러면 또 그녀의 어머니는, 자식 키우고 결혼시키는 게 부모 하는 일 전부인데, 얼마나 궁리하고 생각했겠니? 결혼도 때가 있어.적절한 나이에 가는 게 좋아.너 금방 서른 된다.학교 교사 하다 보면 이래저 래 시기를 놓칠 수도 있고,만약에 집에서 멀리 발령나고 하면 어떻게 가 지낼 수 있겠니? 결혼은 네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는 거야. 그러니까 제대로 해야지. 하며 타일렀다. 또 이에 질세라 선옥은, 엄마 말 다 맞아.알아. 일단,어머니의 말에 옳다고 인정을 하고서는 다시 조목조목 자기의 주장을 내세웠다. 엄마, 지금 내가 결혼한다고 치자.솔직히 내가 뭐 아는 거 있어? 그래도 무슨 준비는 했어 야 하는데,나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잖아.엄마하고 아빠만 결혼시킬 마음만 가지고 있지, 당사자인 나는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어.혹시,엄만 이 딸을 대충,적당히 시집이나 보내 버리려고 하는 거 아냐? 난 그럴 순 없어.엄마는 아버지 공무원 박봉으로 딸을 힘들게 공부 시키고선 아깝지도 않아? 나도 한번은 제대로 내 전공을 살리고 싶어.십 년 이상 꿈이라면 꿈인데.엄마,때가 되면 가지 말라고 해도 가.그렇게 쫓아내듯 보내야 속이 시원해? 이건 정 말 쫓아내는 거야.그리고 나 선보고 하는 거 싫어하는 줄 엄마도 알잖아. 이쯤 되면 선옥의 어머니는 지친 듯, 일사천리구나. 아빠 오시면 이야기해. 포기하지만 그러다가도 억울한 기분이 들면 큰소리로, 그럼, 너 대체 누구 믿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하다가 그래도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야,너 하나만 물어 보자.그래서, 너 정말 영민이하고 결혼할 작정이냐? 눈을 부릅뜨고 바락 화를 내며 바짝 다가서면, 누가 영민 오빠하고 결혼한댔어? 선옥은 주춤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이렇게 말 싸움이 시작된 것은,그러니까 영민이 자취를 감출 즈음이었다. 여태껏 결론도 나지 않는 싸움을 계속하면서 이를테면 신경전 비슷한 양상을 띄어 온 셈이었다.선옥은 어떤 자리에서나 혼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했고, 선옥의 어머니는 어떻게 하든 내년 봄에는 약혼을,늦어도 가을까지는 결혼을 꼭 성사시켜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선옥의 눈치를 보며, 비유를 맞춰 가며 그렇게 해 왔던 것이다. 어쨌든,선옥의 부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민과는 혼인할 수 없다는 생각이 변할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쩌면 선옥에게 희망이 될지도 모르는, 마치 천지 개벽과 같은,독재로 얼어붙은 강토에 아침의 정적을 깨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자신이 쌓아놓은 독재의 더미 아래 그저 맥없이 꼬꾸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선옥은 이제 이 땅에 독재가 끝날 것이며, 새로운 민주 정부가 서게 되고,그러면 무엇보다도 영민의 문제가 뜻밖에도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이렇게 급박하게 변해가는 상황에서, 선옥은 영민에게서 분명히 한 번은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역시 소식이 없었다. 마음 한편으로는,과거 재야 세력과 다시 연계가 되어 무슨 일을 꾸미려 하는 것은 아닌지,전국은 비상 계엄으로 오히려 불심검문이 더 강화될 일은 분명한데 피신하고 있는 곳은 안전한 것인지 여러 생각이 다 났다. 영민이 말한 약속의 날짜는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그녀는 혹시 시골에 가면 무슨 소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영민과 약속한 대로 내일은 꼭 시골을 다녀와야겠다고 작정하였다. 다음 날은 일요일. 선옥은 집에 적당히 말을 해 두고 고향을 가기 위해 이른 새벽 집을 나섰다. 통금 시간이 연장된 관계로 서두르지 않으면 하루에 다녀오기가 어렵다는 생각에서였다. 지난 주에 갔어야 했는데, 집안 일이 겹치는 바람에 말도 끄내지 못하였다.영민의 문제를 가지고 너무 지나치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일요일이라서 영민의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김 목사나 정 순경을 만나기엔 다른 평일에 비해 수월하다는 생각과,또 그들중에 누구에게든 영민 어머니의 병원 문제를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떠나기로 하였다. 버스 정류장에 나와 시간을 재 보니, 막차로 돌아온다고 해도 시골에서 일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다섯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그러고 보니, 지난 겨울에 영민과 둘이서 바닷가에 다녀오고는 처음인 셈이었다. 그 여행의 기억이 되살아났다.한참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했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낯선 어느 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수심에 찬 그의 얼굴이 자꾸만 지워지지 않고 앞을 가렸다. 보고 싶다,보고 싶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차 창 밖으로 스치는 정경들은 가을로 가득찼다. 수확의 결실을 만끽하는 마음 넉넉한 농부들의 모습과, 시퍼런 하늘 한 가운데 한가롭게 떠가는 한 조각 구름. 이 땅의 최고 권력자가 심복의 총에 쓰러지는 비극을 낳기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너무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계엄 상황의 거리는 이상하게도 살벌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기운을 잃은 듯 서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고,점점 초점을 잃어 가는 것처럼 보이었다. 아니,이 시련은 모든 사태가 수습되면 그야말로 새 역사의 전기를 이룰 수 있는,한 번은 겪 어야 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세 시간 이상 달린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바닷바람이 갯내를 싣고 먼저 선옥을 맞이하였다. 이 포구에서 열 다섯 살 사춘기 때까지 보내었던,선옥에게는 늘 그리운 곳이었다.그녀가 살았던 그 집은 지금 작은집 식구들이 아직 살고 있어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오늘은 들를 수가 없었다. 선옥은 이내 영민의 집으로 갔다. 그녀가 영민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넓고 텅 빈 마당이 그처럼 허전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계세요? 어머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세를 내놓은 별채 가게 쪽도 가 보았지만 영민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가게 주인 여자도 잘 모르겠다며 잠깐 기다려 보라고만 말하였다. 선옥은 속으로 아직 예배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하며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 선옥의 뇌리에 언뜻 떠오른 것은,언젠가 영민이 한 말로 어머니가 뒷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자주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선옥은 곧장 뒷산으로 뛰어갔다.자신도 어린 시절 바다를 바라보며 올라가면, 마치 바다가 일어나서 가슴 한복판에 다가서는 착각을 느끼던 곳이었다. 뒷산 바로 거기, 영민 아버지 묘소 앞에는 하얗게 한복을 차려 입은 영민 어머니가 바다 쪽을 향하여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선옥은 가까이 달려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어머니,저 선옥이에요. 글썽이며 손목을 붙들었다.영민 어머니는 지그시 웃는 모습으로 선옥의 머리를 매만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여기까지 웬일이야? 말하고는 한참을 더 말이 없었다.거동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힘드시게 보이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 오셨어요? ...... . 얼마 뒤 선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영민 어머니를 부축하여 세우면서, 기운이 없으세요,어머니? 길 아래로 인도하는데,영민 어머니는 가던 길을 돌아서서 영민 아버지의 묘소를 바라보며 힘 없는 고개를 두세 번 무겁게 끄덕이었다. 선옥은 그것이 영민 아버지에 대한 작별 인사라는 것을 짐작하였다.내 갔다 다시 오리다, 하는 인사였을. 그런데, 선옥이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영민 어머니가 거의 반 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허리가 굽고 몸이 야위어졌다는 느낌이었다.선옥은 믿기지 않을 뿐이라고만 속으로 중얼거렸다.그리고, 이는 영민에 대한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머니,말씀 해 보세요.많이 편찮으신 데가 어디세요? 그냥,그래. 그래도 아주 많이 편찮으신 데가 있을 것 아니겠어요,어머니. 괜찮아. 괜찮아,괜찮아 하지 마시고 한번 말씀해 보세요. 영민 어머니는 이따금 기침을 하였고,심한 경우에는 거칠다고 느낄 정도로 숨을 힘들게 내쉬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왔어? 건강이 어떠신가 한 번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 왔어요. 나를? 집안에 일이 있어 온 게 아니고? 어머니 뵙고 싶어 왔어요. 요즘도,영민 오빠 찾는 사람 있지요? 영민이? 예. 모르겠어. 모르겠다니요.무슨 말씀이세요? 나한테는 안 오니까. 그럼요? 영민 어머니는 집에까지 걸으면서 여러 말을 했지만, 행동거지가 불편하고 목소리가 작아 서 옆에서 말을 붙이기가 안쓰러웠다. 이 늙은이한테 와 봤자 뭐 알겠다고 오겠어? 예? 지서 정 순경이 알지,난... . 선옥과 영민 어머니는 집으로 갔다. 영민 어머니는 바로 교회에 가야 한다면서 마루에 걸터앉았다.선옥은 성경과 찬송가를 가져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안방에 들어갔다. 방 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역시 정갈한 차림에 성실한 성품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선옥은 영민이 어렸을 때 썼다고 들은 적이 있는 작은 책상에서 성경과 찬송가를 찾다가 우연히 이상하게 보이는 어떤 봉투를 발견하였다. 그건 영민의 학교에서 온 제적 통보였다.일찍부터 제적되었을 것으로 영민도,자기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통보 용지를 보니 마음이 울컥하였다. 그러면서 선옥은, 아마 영민 어머니는 영민이나 자기보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가슴이 아팠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어쩌면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선옥은 영민이 보낸 돈을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오빠는 잘 있어요.걱정 마세요. 선옥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영민 어머니가 들을 정도로 말하였다. 저 남쪽 지방에서 불쌍한 어린애들을 가르치며,잘 피해 있으니 걱정 마세요.그리고 서랍에 오빠가 어머니 꼭 병원에 모시고 가라면서 송금한 것을 넣어 두었어요.제가 모시고 가야 하 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라 병원에 함께 못 가서 어떡하죠? 목사님이나 오빠 친구에게 부탁을 할까 했는데... . 못난 놈,제가 돈이 어디 있다고... . 오빠 이제 얼마 있으면 괜찮아질 거에요. 그래야지.우리 영민 아버지를 죽인 사람도 죽었는데. 여기서 영민의 어머니는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다는 듯. 우리 영민이도 이제 마음 놓고 사는 세상이 올거야. 그러니까 병원도 가시고 해서, 기운 차리시고 힘 내셔야 돼요. 그런데, 돈은 어떻게 된 거야? 오빠가 일을 해서 번 돈이래요. 영민이가? ...하긴,이 세월에 남편이나 아들이나 제 손으로 피땀 흘리고 벌어서 내민 걸 한 번도 못 받아 보았으니까... . 사실 그런 셈이었다. 영민 아버지도 선친이 남긴 재산으로 적당히 살았고,큰 아들 영한도 명절이나 되어야 전화를 할 뿐,이민을 떠나 버린 뒤 시간이 흐를수록 집에 소홀해졌다.정말 영민이 제 손으로 일을 해서 돈을 보냈다는 것은 영민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돌아온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도피든,무엇이든 영민은 벌써부터 서로 안 보고 지낸 것이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 세상 어디에든 목숨만 살아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교회 갈 시간이야. 영민의 어머니는 일어섰다.선옥은 얼른 영민 어머니를 붙들었다. 제가 모시고 갈게요,어머니. 저도 목사님 뵙고 싶어요.저 어렸을 때 많이 예뻐해 주셨는 데. 참 좋으신 분이지.영민이를 위해서도 늘 기도해 주시고. 오빠도 꼭 뵙고 오라 했어요. 오랜만에 고향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선옥은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 하나 뚜렷하게 변한 것 같지 않은 예배당은 그 소녀 시절 그녀의 꿈을 간직한 채 그대로였다. 낡았지만 곱게 손때 묻은 긴 나무 의자며,초라하지만 정성으로 장식한 제단이며,색은 바랬지만 아직도 그 자리엔 그녀 자신이 앉았던 풍금이며,세월은 그대로 거기에서 멈추어 서있었다. 선옥은 고개 숙여 눈물로 기도하였다. 진정 당신의 뜻이 있다면 여기 이렇게 세상 그 어떤 것도 갖기 원하지 않는,한 노모에게 오직 마음 하나만 넉넉하게 지니고 살 지혜를 주십사고 뜨거운 가슴으로 기도하였다. 그리고 세상에 버림 받아 헤매는 어린 양 한 마리, 길 잃지 않도록 꼭 지켜 주십사고 두 손 모아 소리내어 기도하였다. 김 목사도 영민의 가족에 대한 기도를 잊지 않았다.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이 다 돌아간 뒤,선옥이 영민 어머니와 일어서려는데 김 목사가 다가와 영민 어머니 옆 자리에 앉았다. 김 목사는 선옥의 등을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언제 왔어? 선옥이 이제 시집가도 되겠는걸? 목사님, 내내 건강하시죠? 내 건강이야,뭐. 영민이 어머님 건강이 문제지. 두 분 모두 건강하셔야죠. 지난 번 전화에 선옥이가 영민 어머님 건강 어떠시냐고 물었지? 그 뒤에 연락 영민이와는 되고? 야학이랑 하는 일은 잘 된대? 그런가 봐요.힘들고 해도 겉으로 내색은 안 하니까요. 어머님 걱정이 많겠구나. 선옥이 네가 소식을 알고 하면 계속 나한테 일러 줘. 몇 번 기침을 하던 영민의 어머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동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살았는데... . 이제 정국이 변하고 있으니 금방 구제되겠지요.걱정 마세요,영민 어머님. 목사님,글쎄,영민이가 돈을 벌었다고 선옥이가 가져 왔어요. 그랬어요? 영민 어머님 참 좋으시겠네요. 그럼요.자식한테 돈 받기는 이 나이에 처음이니까요. 목사님,영민 오빠가 어머님 편찮으신 것을 알고 저더러 병원에 모시고 가라면서 송금을 한 거에요. 효자 두셨어요,영민 어머님.그러니까 꼭 병원을 가 보세요.내일은 가시는 거에요? 곧 날씨 도 추워질 텐데 노인 분들은 조심하셔야 돼요. 참,내일 제가 시간이 나니까 제가 모시고 가 겠습니다. 김 목사는 영민 어머니에게 말할 때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잘라 하였다. 목사님,실은 어머님 병원에 모시는 것 때문에 고민했어요.저는 오늘 막차로 가야 해서 요.영민 오빠가 송금하면서 몇 번 부탁했거든요.그렇지 않아도 목사님께 어떻게 말씀을 드리나 걱정이었는데. 영민 어머니는 괜찮다는 말을 거듭하였다. 영민이 뜻도 생각하셔야죠.객지에서 소식 듣고 얼마나 가슴 아파했겠어요? 그리고 영민 어 머님,요즘 다시 부쩍 안 좋아지신 것 같아요. 선옥은 김 목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름답다고 흐믓한 일인가. 선옥은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김 목사의 가족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쟁 중에 헤어진 처자식을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도 마음 하나 변하지 않고,이 곳을 지키며 기약 없는 날을 기다리는 그의 정신에서 선옥은 다시 한 번 사랑의 숭고함을 터득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정말 영민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그리고 자신에게 현재 주어진 반 년밖에 안 된 영민과의 헤어짐에서 자신은 얼마나 더 견디고 또 기다릴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김 목사는 나중에 선옥에게 영민의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내었다. 선옥이가 어렵겠지만,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나도 곁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안타깝기만 해. 하지만,영민이 어머니는 잘 견디시는 편이야.혼자 사시는 것도 익숙해졌고.문제는 영민 이지.물론 잘 있대니까 나도 안심이 되긴 하지만,그것이 무작정 언제까지 이어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경찰에서도 실적 올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지난 시위 문제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그들이 바라지 않는 단체에 가입되어 있었다면 그냥 당하 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지.정국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새 민간 정부가 들어서면 틀림없이 좋게 해결되리라 믿어.따지고 보면 영민이 같은, 나라를 걱정한 사람들 이 있었기 때문에 군사 독재 정권이 무너진 것이지.곧 새 민주 정부가 들어설 것은 분명한 것이니까 조금 피신해 있으면 수배 해제가 된다든지,아니면 자수하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든 지 하는,영민이에게는 유리하게 될 거야.다만 계엄 상황에 잘 피해야 할 텐데... . 선옥은 무엇보다 자기의 일처럼 보살펴 주는 김 목사의 성의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항상 영민 오빠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을 오빠도 잘 알고 있어요. 영민이네나 나나 또,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이산 가족들, 모두 이 땅의 희생자들 이지. 영민이는, 민족 분단의 역사가 남긴 권력자의 욕망 속에 순결을 짓밟힌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이고. 선옥은 김 목사와의 대화에서 위안을 가질 수 있었다. 김 목사의 처지를 생각하면 영민이 겪고 있는 것은 한 순간의 고통일 따름이었다.그리고 머지않아 모든 일은 해결될 것이고,따라서 불안해 하거나 초조할 일은 아니라고 마음 먹었다. 오후가 되어 선옥은 영민의 어머니와 함께 점심 준비를 하였다.집에서는 제대로 한번 부엌일을 해 보지 않은 선옥은 조심조심 어설프게나마 영민의 어머니를 도왔다. 편찮으신데 들어가 계세요.제가 준비할게요.저도 할 수 있는데. 선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사실 혼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속으로는 영민 어머니와 같이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야 했다.부엌에서 일하는 영민의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선옥은 힘들어 하는 영민의 어머니가 하루에 세 번씩은 식사 준비를 해야 하고 또 여러가지 집안일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저 안타깝기만 하였다.그러면서도 부엌이나 집안 군데군데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영민의 어머니가 혼자 살며 살림하는 일이 어느 정도 몸에 배어 있는지를 선옥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선옥은 정 순경을 만나기 위해 지서를 찾아갔다. 마침 자전거로 순찰을 끝내고 돌아오던 정 순경이 지서 앞에서 선옥을 먼저 발견하고 다가와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니,이게 누구십니까? 이선옥씨 아니에요? 선옥은 정 순경을 보고 약간 낯이 설다 싶었는데, 나,기억 안 나요? 영민이가 전도해서 교회에 한 두어 달 나갔었는데.성가대 할 때,선옥씨 가 풍금 치면 바로 그 옆에 앉아 있었잖아요. 선옥은 그의 말에, 이내 학생 시절의 정 순경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요.이제 기억나요.영민 오빠 말을 듣고 저는 누군가 했어요.오늘 여기 오면서 생각 해 봤지만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거에요.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가까운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골 다방은 한가하여 쓸쓸할 정도였다. 영민이 문제로 한 번 올 줄 알았어요. 오빤데 말 놓으세요. 숙녀가 되었는데 그럴 순 없지요. 제가 불편해요. 그럼, 말 놓을까요? 따지고 보면 고향 후배이니까 말 놓아도 되지,뭐.안 그래? 정 순경은 자기 이름을 확실히 알려 주면서 영민을 부르듯이 자기 이름 뒤에 오빠를 붙이라고 할 정도로 우스갯소리도 하고 우선 마음을 편히 갖게 해 주었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갑자기 기억나는 게 하나 있어.영민이는 항상 선옥이 이야기를 잘 했 거든.그 때 우리 친구 몇이서 선옥이를 속으로 짝사랑들을 했는데, 영민이가 친구들에게 제 동을 걸고 선언을 했던 거야.선옥이는 뭐, 자기 거라나? 선옥은 고향에서 오랜만의 추억으로 흐뭇함을 느꼈다. 선옥은 바로 여기에 영민이 같이 있다면 얼마나 더 포근한 자리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으나,그저 지나간 이야기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선옥이 먼저 영민의 말을 꺼냈다. 민구 오빠,영민 오빠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에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할게.일이 발생하고 몇 번 지서로 연락이 오기도 했고, 또 서울에서도 몇 번 직접 형사들이 내려왔었어.집에도 가 보고 했지만 헛걸음만 쳤지.어머니만 지키는 집 을 보고 돌아갔는데, 본인이 없고 실제로 연락을 끊고 지내는데 그 사람들인들 무슨 방법이 있었겠어? 처음에는 내가 직접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도대체 어느 정도의 활동을 했냐 고 말야.그런데 자기들은 잘 모른다는 거였어.알고 있을 텐데 왜 모르느냐,뭘 알아도 알아 야 우리가 도울 거 아니냐 하면서 말하니까 대충 그 때 내가 한 번 영민이 어머님께 했던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선옥이도 그건 알고 있지? 예.저희 집안 일도 있고 해서 여기에 왔을 때, 영민 오빠 어머님을 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셨어요.물론 어머님은 영민 오빠가 저와 연락이 되는 줄 알고 말씀하신 거죠.저는 그 이 야기를 한참 지난 뒤에야 영민 오빠에게 전했어요.처음엔 세 달 이상을 연락이 안 된 상태 였거든요.영민 오빠는 아마 우리 집에 도청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지요.그래서 시간을 번 뒤에 조심스럽게 전화한 것이에요.영민 오빤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 했어요.믿기지 않아 했는데,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에요? 실적을 올리려고 혈안인데 더러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영민이가 마음 다 정리하고, 졸업 하기 위해 복학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어.복학 신청을 하고 어머님 뵈러 왔을 때 만 났었지. 그 때 내가 영민이에게 농담으로, 너 참 잘도 안 걸리고 버텼다고까지 했는데. 사실,영민 오빠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오빠 학교에 놀러 간다고 하면 오라 하지 않 았어요.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정말 우리는 만나도 숨어서 만나고 했을 정도로 자신을 숨기며 그 일을 그렇게 열심히 했어요.그만큼 영민 오빠는 자신이 하는 일에 철저했어요.적어도 그 일에는요.외로운 싸움을 한 것이지요.그런 것들은 형님으로부터 많은 걸 깨치고 배웠던 것 같아요.형님께서 떠난 뒤 우연히 발견된 형님의 일기장을 몇 번이고 탐독했으니까요.영민 오빠는 너무나 큰 그 부조리의 권력 앞에 철저하게 싸우려 했어요.민 구 오빠도 알지만, 아버지께서는 불행하게 돌아가시고,형님은 우울하게 이 땅에서 떠나야 했으니까 영민 오빠 가슴에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 못할 그 무엇인가 사무친 게 있었을 거에 요.그 사이에서 한없이 어머니 때문에 갈등도 하면서 말이에요. 선옥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끝내,그 권력은 막을 내렸지.허망할 만큼 비참하게. 저는 영민 오빠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또 모르지. 어떤 더 무서운 권력이 나타날지도. 뻔히 종말이 어떤 것인지 보았는데도 또 다시 역사의 오류를 저지를까요?. 글쎄. 목사님은 새 민간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며 영민 오빠는 곧 풀려 나게 될 거라 하셨어요. 나도 그것만 바라고 있는 거야.이왕 이리 된 것,끝까지 버티는 수밖에. 계엄 상황이라 피신이 쉽지 않은데요.불심 검문도 많고. 지난 번에 서울에서 연락이 왔는데, 영민이를 알만한 고향 선후배를 파악해달라는 협조 가 있었어.내가 적당히 해서 보냈지만, 혹시 그 사람들을 통해 선옥을 찾아낼지도 모르지. 저들의 상투적 수법 중에 하나가,애인을 찾아내어 취조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옥씨도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할 거야. 그리고 저들이 선옥씨를 포착하면,마음만 먹 으면 도청도 가능해. 한시라도 빨리 연락처를 다른 곳으로 하는 게 좋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나한테 연락해도 되겠지만 실은 나도 주변 인물이니까,선옥씨와 마찬가지인 셈이지.가장 좋은 건 연락을 끊는 거야.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겠지만.우선은 그 친구,다만 어머니 때문 에 연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선옥씨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차라리 어머니께선 건강하시다고 할 걸 그랬어요.하지만,물론 그런 일이야 일어나지야 않 겠지만,만약에라도 갑자기 어머니께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될까 해서 연락을 유지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내 생각엔,영민이에게서 연락이 오면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이쪽에서 가명으로 전보 나 편지를 할 수 있도록 연락처 주소를 알아두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아.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영민이 어머니께서 건강하여 아무 일이 없어야 돼.무슨 일이 생기면 찾아올 것이고,그러 면 피신은 끝나고,그 동안의 일은 다 허사가 되는 거지.그리고 이런 경우,저들이 불심 검문 아니면 주위 사람들의 첩보로 검거하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현재 있는 곳이 안전하다면 그 대로 버티는 것이 길이야. 미국에 가신 영민 오빠의 형님이 한번 다녀가시면 좋을 텐데요. 영민이 어머님 성격으로는 연락이 오면 무슨 말을 하실는지 모르지만, 미국에 먼저 연락은 안 하실 걸.또 연락이 와도 아들에겐 걱정 끼칠 말씀은 전혀 안 하시는 분이니까, 옆에서 보고 있으면 안타깝고 마음 아픈 일이지. 민구 오빠,오늘 고마웠어요. 빨리 모든 게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차가 식어가는 것도 모르면서 영민의 문제에 대한 선옥의 근심은 끝이 날 줄 몰랐다. 얼마 뒤,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 순경은 비상 근무 중이어서 다른 때와 달리 할 일이 많다고 말하였다. 선옥은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줘. 잘 될 거야.걱정하지 말고. 정 순경은 지서로 돌아가고,선옥은 바로 영민의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선옥은 다시 한 번 영민 어머니가 병원에 꼭 간다는 다짐을 받고 싶었다.김 목사가 동행을 한다 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고,또 영민이 얼마나 바라는 것인가. 시간은 막차를 타려면 한 시간 가량 더 있어도 될 일이었다. 집안은 조용하였다. 언제나 이렇게 적적할 것이라는 생각에 선옥은 마음이 무거웠다. 정 순경은 만나고? 예,어머니.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인제 그만 서울 올라가야지.안 늦었어? 아직 조금 시간 있어요. 저,어머니,내일은 꼭 병원에 가셔야 돼요. 응,알았어.목사님 말씀대로 영민이 뜻이 그렇다니까 내 꼭 가마. 어머님 건강하셔야 영민 오빠도 마음 놓고 잘 지낼 거에요. 영민이 정말 몸 성히 잘 있는 거지? 걱정 마시고,어머님은 어머님 건강에 신경 쓰세요. 그래,죽어도 영민이 잘 되는 것 보고 죽어야지. 어머님,꼭 식사 걸르지 마시구요. 응,그래. 어머님,오래 오래 사셔야 돼요. 늦겠어. 어서 가 봐야지. 약해지시면 안 돼요,어머니. 이따금 기침을 하는 영민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선옥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침할 때마다 가쁘게 내쉬는 숨에 선옥은 자신의 가슴이 그 무언가에 억눌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둘러. 영민 어머니는 선옥의 손을 붙들면서 헤어짐이 아쉬운 듯 깊은 눈에 눈물을 보이었다. 어머님,정말 기운을 차리시고 낙심하지 마세요.영민 오빠 자유의 몸으로 만날 날,꼭 올 거 에요. 선옥은 여러 번 뒤를 돌아다보았다.눈물을 애써 감추며 선옥을 보내는 영민 어머니는 금방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듯 나약해 보이었다. 버스 정류장은 일요일 오후라 번잡하였다. 선옥은 차표를 사고 대합실에 앉아 차가 들어오기를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어찌된 일인지 자꾸 영민 어머니의 모습이 눈 앞을 가로막고,기침할 때 힘겨워하며 내쉬는 거친 숨소리가 좀처럼 떠날 줄 모르고 선옥의 가슴을 조여 오는 것이었다.세상에 무슨 죄가 있어 반평생을 그리 보내야 하는 건지. 선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떠나기에는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창구로 달려가 차표를 반환하였다.그리고 가까운 다방을 찾아 들어갔다. 단 하룻밤이라도 영민 어머니에게 외로운 밤이 아닌,평안한 밤을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이 선옥의 마음을 휘어잡았다.그것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선옥으로는 쉽지 않는 마음의 결정이었다. 시외전화를 신청하였다. 그녀는 무슨 말로 집에 이야기해서 설득을 시킬 것인가 궁리했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낫겠다 싶었다. 엄마,나야.아침에 나올 때 말은 그렇게 안 했지만, 사실 나 영민 오빠 시골 집에 왔어. 뭐라구? 금세 그녀의 어머니의 놀라는 목소리가 전화에서 튀어 나왔다. 아침에 거짓말해서 미안해.사정이 좀 그랬어.영민 오빠 어머니, 엄마도 대강 알지만 너무 가엾으셔서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하루 여기서 자고 갈게.엄마,그래도 되지? 여기는 정류장 앞 다방이야. 가려고 나오긴 했었어. 그런데 그냥 갈 수가 없더라구.엄마,자세한 건 집에 가서 말할게.아빠도 싫어하겠지만 엄마가 잘 말해 줘. 얘 봐.아주 제 멋대로네?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냐,엄마? 어서 차 타고 와. 막차도 끝났어.엄마,영민 오빠 어머니 많이 편찮으신데 혼자시잖아.그거 이해 못 해? 그래도 그렇지.네가 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거니? 단 한 번인데 그것도 안 돼? 내가,여기서 사는 거야? 엄마, 단 한 번이야.내일 오전에 갈 게,응? 내일 학교는? 휴교령 내렸잖아. 졸업 연주도 얼마 안 남았으면서 정신이 어디 있는지, 도대체가 틀려 먹었어. 용서해,엄마.실은 엄마한테 전화하면 이해할 줄 알았어. 이렇게 심하게 나올 줄은 몰랐어. 내가 남자하고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말야.내 기분 좀 생각해 줄 수 있잖아. 끊어,난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엄마,엄마... . 하여튼 허락은 받은 셈이라는 생각으로 선옥은 바로 다방을 나와 다시 영민의 집으로 갔다선옥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영민을 대신해서 영민 어머니와 한 밤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의미가 있음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가 남아 있는 방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를 위하여 함께한다는 것은 어쩌면 즐거운 일일 수도 있었다. 영민 어머니는 다시 돌아온 선옥의 뜻을 알고,부모 걱정을 말하면서도 내심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선옥은 부모로부터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어머니,제가 저녁 준비할게요. 선옥은 신이 나는 듯 웃옷을 벗어던지고 부엌에 들어가 점심 때 익힌 부엌일을 시작하였다. 아냐,오늘 왔다 갔다 하느라 힘들었으니 들어가 쉬어. 어머니,저는 솔직히 어머니와 같이 일하는 게 좋아요. 그래? 집에서도 어머님 일 도와 드려? 그 말에 선옥은 부끄러움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아뇨. 시집가려면 많이 배워야 돼. 선옥은 영민 어머니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시집이라는 말이 생각할수록 의미가 분명해지지 않는 것이었다.선옥은 그 말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느꼈다.아무튼 묘한 기분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선옥은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영민을 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 동안 그 녀는 영민과 결혼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 왔다.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장차 될 시어머니와 부엌일을 하면서 매사 조심스럽게 일을 거들어야 한다는 것만 생각이 났다. 영민 어머니는 더러 웃음을 보이었다.오랜만에 찾아온 사람으로 기운이 더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한번은 별채 세 놓은 가게 여자가 와서 식사는 했는지 물어 보고 갔는데,무슨 일이 생기면 가까이에서 영민 어머니를 도와 주고 하는 것으로 보아,영민 어머니에게는 큰 의지가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선옥은 저녁 내내 영민 어머니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였다. 영민이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영민 어머니도 다소 즐거운지 목소리를 더 높이려 애썼고,선옥이 역시 궁금한 것들을 물으면서 흥미롭게 들었다. 풀벌레들의 울음이 아직 남은 가을 밤을 그렇게 보내면서 선옥은,세상에 행복은 누구라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그리고 선옥은 영민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안다면, 당장 어머니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영민에게 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 영민이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시간은 무심히도 밤을 재촉하고 있었다. 선옥은 흡족한 마음으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영민 어머니는 일찍 김 목사로부터 전화를 받고 선옥과 같이 서둘로 병원에 갔었는데 진찰 결과 생각보다 깊은 병은 아니었다.그러나,현 상태에서 기침이 더 심하여 열이 나고 숨찬 현상이 계속되면 페렴으로 악화될 수 있고 뜻하지 않는 일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환절기도 오고 하니 감기를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며,몸이 허약하니 영양 보충에도 신경 쓰고, 특히 다른 병으로 확산되어 고질병이 되기 전에 치료를 서둘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아무튼 때 맞춰 병원을 찾은 것은 큰 다행이었다.그리고,무엇보다도 김 목사가 영민 어머니의 몇 차례 통원 치료를 위해 시간을 낸다 하니 선옥한테는 여간 마음이 놓이는 게 아니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영민 어머니는 영민의 송금이 고맙다고 몇 번 말하였다.영민에게서 연락이 오면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하라고 또 몇 번 당부하였다.그런 영민 어머니를 보고 떠나면서 선옥은 자신이 영민 어머니와 하룻밤을 같이 한 것에 대해 참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선옥은 마음이 가벼웠다.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울에 가면 당장 부모와 부딪칠 일이 신경이 씌었지만,그녀에게는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제 5 부 만선 만선이었다. 근래 들어 보기 드문 벌이였다.선주는 선창에 나와 만선 깃발을 날리며 입항하는 배를 보고 절로 춤이었다.선원들은 모두 생기가 넘쳐 있었다. 오랜만에 떼 좀 벳기게 됐네,그랴. 저 선주 영감 좋아허는 거 봐. 어판장 시세는 좋겄지? 딴 배는 별 신통치 않응게 고깃금이 괜찮을겨. 배를 어판장 쪽에 대자,기다리던 선주가 얼굴에 가득 웃음을 하고 배에 올라선다. 다들 고생혔지? 딴 배들은 심통여.칠성호 부러워 난리랑게. 그려유? 무선국에 가서 알아 보고,아까부터 나왔는디 배가 들어와야지. 그러면서 선주가 영민을 보자, 별 일은 없었고? 무슨 말이라도 할 말이 있다는 듯 옆에 다가선다. 뉴스들 들었는가? 예? 바다 나가믄 뉴스도 안 들어? 뉴스라뇨? 아니,그렁게 사흘 전에 대통령 죽었다는 거 몰랐단 말여? 순간,영민은 멍하였다. 주위 사람들도 놀라며 뜻밖의 사건에 한 마디씩 붙였다. 십 수 년 체제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일어날 것같지 않은 사건으로 여겨졌기에자세한 내막을 묻느라 만선 이야기는 뒷전으로 사라졌다. 영민은 선주를 통하여 사건의 내용을 대략 들었지만 전모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이 대항했던 독재의 실세가 쓰러진 건 틀림없는 현실이었다.정말 기약 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그 독재의 끝이 어느 새 곁에 와 있다는 것은 영민에 야릇한 흥분에 휩싸이게 했다.분명히 이 땅에 엄연히 존재하였던 독재의 한 실체는 끝난 것이었다. 영민은 당장 어디서 신문이라도 한 장 구해서 보고 싶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선원들은 한결같이 그런 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은 분주하였지만 앞으로 어떻게 정국이 변하고,자신의 문제는 또 어떻게 풀려 나갈지 궁금하기만 하였다. 다만,영민의 저 마음 한 구석에서는,새로운 민주 정부가 아닌 또 다른 군사 독재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한석이,뭘 골똘히 생각혀? 갑판장이 다가와 어깨를 치는 바람에 영민은 정신을 차렸다. 점심 먹고 고기 푼대는디? 벌써 선주 양반 위판 헐 준비혀 놓고. 어떻게, 금방 내릴 수 있게 됐나 보죠? 선주 양반이 하두 수완이 좋응게.빨리 셈 봐야 뭐가 떨어져도 떨어질 거 아니겄어? 형님 회계 대면 빨리 집에 다녀와야겠어요.아주머님도 보셔야 되고.기분 좋으세요? 기분? 자네도 줄포댁 빚 갚고, 나도 집에 가서 대우 받아야지. 한 번씩 집에 가면 식구들 좋아하죠? 그렇지.참,자네 어머니 소식 알어 봐야지,어서. 바다서 걱정 많이 혔잖어. 영민은 그렇지 않아도 벌써부터 입항하는 대로 바로 줄포집을 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후에는 잡아온 고기들을 어판장에 내리는 작업이 있다는데,물론 수협에서 작업부들이 나와 하겠지만,혼자 배에서 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고,어차피 전화는 지난 번같이 저녁 늦게나 해야 될 일이었다. 칠성호 선원들은 작업이 끝내고 뒷처리를 한 뒤 저녁이 다 되어 선주 집에 모였다. 선주 집에서는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로 흥청대었다. 선주 부인은 지난 번 돈 떼인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는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배 사업이라는 게 원래 몇 번 허탕을 쳐도 단 한 번에 복구가 가능한 것이어서 충분히 그럴 만도 하였다. 자,맘껏 먹고 또 한 번 더 만선 허드라고. 선주는 계속 선원 한 사람씩 술잔을 나누며 술이 어지간히 취해 갔다. 어이,안주가 어찌 시원찮은 것 같은디 본디 거 좋은 것 좀 만들어 와 봐. 하는 선주의 명에 선주 부인은 재빨리 움직였다. 예,예.곧 대령헐친게 쪼께만 기다리슈잉. 술도 더 사고.정종 다 떨어져 가는구만. 어이구, 하나 하나씩만 시키슈.지가 몸땡이가 둘인지 아는가뷰? 영민은 아까부터 시계만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방 안 한쪽에 있는 책상에 음식을 쌓아 둔 신문지를 발견하였다.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린 신문이었다. 그는 곧 일어나 신문을 가져 와 처음부터 자세히 읽어 내려갔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저녁에 발표한 사건의 진상이었다. 옆에서 사람들도 신문을 기웃거리고 잠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이,자네 한 잔 받아. 기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까지 와서 술을 권하였다. 예.제가 먼저 잔을 올렸어야 하는데요. 잔 비우고 따라 주면 되는 거지,뭐. 기관장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기관장님, 그 보약 많이 하지 마세요. 보약? 자네 그걸 잊지 않고 있었어? 서로가 말 그대로 한 배를 타는 사람인데요.그걸 제가 잊겠습니까? 기관장은 서너 번 술잔을 비우고는 대뜸, 참 세상 돌아가는 것, 그걸 누가 아나.아니, 그런데, 대통령도 총 맞으면 죽는 거야? 하며 영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 대통령도 인간인데요. 영민은 그 말을 해 놓고 술 기운 속이지만 참 멋없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다 죽어도 그 양반은 안 죽을지 알았다,이거지.이십 년도 못 채우는 걸 가지고.자네, 이제 세상 어떻게 되어 갈까? 글쎄요,이제 진정한 민주 정부가 서겠지요.우리 국민들도 이제 수준이 높아졌으니까 제도 도 바뀔 것이고, 뜻있는 정치인들도 벼르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나서겠지요. 국민 수준? 그 동안 많이 나아졌지요. 봐.여기 있는 우리들 이게 수준이야? 물 속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고기떼 찾아 헤매는 우 리같은 수준 말야? 한 번 어떻게 재수 좋아 만선 했다고 진탕 술 마시고 있는 우리 말야.물 론 자네는 다르겠지.그럭저럭 살아가는 우리가 수준은 무슨 수준이 있겠어? 기관장님,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열을 올리시는 거에요? 그러자 기관장은 무엇인가 알아냈다는 듯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틀림없이 똑같은 세상 될 거야. 예? 그 맛을 보았는데 또 그 맛을 보려고 덤빌 작자가 없을 것 같아? 영민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하려는데,선주가 다가와 영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자네,앞으로 얼마나 더 배 탈는지는 모르겄지만,고생이지? 고생은요.견딜만 합니다. 그려? 그럼,자네 이제 정식으로 우리 배 타야겄구만. 사람들 말이 시대도 변헌다고 그러는 디 자네한테도 좋은 세상 오겄지.사실 우리 조카 놈도 서울 가서 공부혔는디 학교 다닐 적에 지 애비 속 되게 썩였응게. 그렇습니까? 그 조카 놈 얘기가 나왔응게 허는 얘긴디, 어려서부터 내가 제일 이뻐혔지.우리 집은 딸만 셋이라 솔직히 그 녀석헌티 정이 갔던 거야.시방 와서 허는 얘기지만 자네 얘기 갑판장헌티 처음 듣고 그 조카 놈 생각이 나서 배 타게 허락혔던 거지.인제 알겄나? 선원 구허기도 힘 드는 건 사실인디 만에 하나라도 걸리믄 골치 아프고 큰일인게 조심혔지만, 그나저나 요즘 은 또 사고도 많은게 신경 많이 썼지.사실은,맨 처음에 자네 힘들어서 한 번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디,잘 견디드구만. 영민은 이제까지 이렇게 선주가 자기에게 이야기를 길게 한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한편으로 영민은 지금까지 사실 선원 구하기 힘들어 선주가 자기를 고용하였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불시에 당할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기를 고용했다는 선주의 말에 새삼 고마 운 생각이 들었다. 그 조카 분은 지금 뭘 하나요? 그 녀석? 선주는 갑자기 말문을 닫고,옆에 있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다른 선원들은 서로 술을 주거니받거니하며 여러 이야기로 흥을 돋고 있었다. 그 녀석 그냥 죽어 버렸어. 예? 영민은 선주의 말에 놀라며 선주를 쳐다보았다. 선주는 다시 잔에 술을 붓자 영민이 이내 술병을 달라며 잔을 채웠다. 다른 선원들은 두 사람에 개의치 아니하고 계속 떠들어댔다. 학교 도중에 군대에 갔는디, 얼마 안 돼서 간첩이 침투혀갖고 작전을 나갔는개벼.근디 그 만 글쎄 죽고 말았다는겨.통보를 받고 동생허고 가 봤는디,뭔 소용여.이미 죽은 놈.긍게, 그 때가 시월 유신인가 되고 한 일 년 됐었지.참 아까운 놈이었는디.공부도 잘 허고,키도 훤칠허니 생긴 것도 준수혔는디... . 선주는 술 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스스로 술을 부어 몇 번 잔을 비웠다.갑자기 설움이 복받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선주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비틀하였다.영민은 이내 선주를 붙들었다. 그만 하셔야겠어요. 그제서야 다른 선원들도 선주를 보고, 너무 좋으셔서 술에 취허믄 내일 선원들 셈은 어떻게 헐라구 그러신대유? 한 마디씩 던졌다. 걱정 마,이 사람들아.이 황 선주가 누군디.자 더 마시드라고. 잔치는 웃음으로 가득 넘쳤다. 영민은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장에게 다가가 작게 입을 열었다. 형님,저 줄포집에 전화 때문에 좀 가 보아야겠는데요. 갑판장도 상당히 술 기운이 오른 모양이었다. 전화? 이 사람, 그냥 아주머니헌티 얘기허고 여기서 허지.갔다 또 와야 헐 거 아녀. 전화한 다음에 그대로 배로 들어가지요,뭐. 여기서 허고,더 놀다 가,이 사람아. 앉아. 줄포집은 내일 셈 대고 가서 기분 좋게 한 번 쓰고.내 말 들어. 영민은 갑판장이 붙드는 바람에 나서지 못하였다. 알겠습니다.그럼 여기서 하죠. 아주머니헌티 말혀 줘? 한 이삼 십 분 있다 제가 말씀드리고 하겠습니다. 술 많이 혔는개벼? 조끔만 마셔.근디 자네 처음에는 술 별로 못혔는디 배 타믄서 술만 배 운 거 같어.안 그려? 영민은 다시 버릇처럼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술자리가 노래 자리가 되었다.선주 부인은 옆집에서 싫어할 것이라며 말렸다. 그냥 노래만 부르지,또 숟가락은 되게 두드렸쌌네.좀 작게 혀.우리 영감 체면도 있응게 동 네 시끄럽다고 신고허믄 어떡헐라구.그라고 통금이 빨라졌응게 그만 일어나드라고. 하며 부엌으로 들어서는 선주 부인에게 영민은 다가가 시외전화를 허락 받았다. 그냥 쓰지.그걸 뭐 허락까지 받느라고.괜찮응게 어서 신청혀. 영민은 안방에 건너가 시외 전화를 신청하고 기다리면서, 선옥의 집 전화에 혹시 도청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신경을 썼다.그 동안 대비해왔지만 갈수록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밖은 노래가 끝났는지 소란스럽지 않았다. 얼마 되어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선옥의 동생인 선우의 목소리였다. 선우구나.잘 있었니? 나 영민이 형야. 형? 잠깐 기다려 누나 바꿔 줄게. 잠시 있다 선옥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별일 없었지? 응,어떻게 갔다 왔니? 어제 갔다 영민 오빠 집에서 자고,오늘 왔어. 어머니랑? 왜, 어머니께서 안 좋으신 거야? 아냐,어머님만 두고 오려니까 솔직히 발이 안 떨어졌어. 병원은? 김 목사님하고 오늘 갔었는데,의사 말은 천식증이 좀 있으시대.그렇지만 몇 번 약 먹고 병 원 다니시면 금방 완쾌되신대.걱정하지 마.어머니께서 영민 오빠 송금한 돈 받으시고 너무 좋아하시더라.정민구 오빠도 보았는데 서울에서 경찰들한테 고향 선후배 신원 파악해달라는 협조가 와서 적당히 해 주었대.그리고 올 때 지서 앞에서 보았는데, 어머니 집에 내가 다니 는 것도 조심하고,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도청도 할 수 있대니까 시골 어떤 곳에도 가능한 연락을 하지 말랬어.위험하다는 거지.그리고 오빠 주소를 알아 두고,물론 가명으로,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연락하는 걸로 하랬어. 인제 시골 가지 마. 설령 저 사람들이 나를 찾아내도 실제 나는 오빠의 거처를 모르잖아. 너를 찾아내면 바로 너를 통해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내려 하겠지만 우선 도청을 시도할 거 야.그리고 이 곳이 밝혀지면 너나 나나 형사들이 여기에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붙들 리는 것이고.나로선 여기서 아무것도 모르니까.우선 문제는 네가 알려지지 않아야 돼.네 가 만약에라도 끌려가거나 하면 어떡하니? 나는 그게 가장 두려운 거야. 그럼 어떻게 해? 방법이 없잖아. 지난 번같이 연락을 끊을 수밖에.어머니도 괜찮으시다니까.다행야. 그럼 주소 알려 줘. 안 돼.그런 건 적어 놓아야 되고 그러면 발각되기 쉬워.그리고 지난 번 내가 보낸 송금한 봉투 없애.만일 너에게 어떻게 해서 저들이 알고 찾아오면 나와 관계를 끊은 지 오래되었다 고 그래.앞으로 이 정국이 달라지면 머지않아 만날 거야.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난 잘 있으니까.어머니 위해서 마음 쓴 것 잊지 않을게. 오빠,그럼 이제부터 연락 안 되는 거야? 도리 없는 일이지. 오빠,잠깐. 졸업 연주 잘 하고. 이만 끊을게. 오빠,오빠... . 영민은 울음 섞인 선옥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술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속으로 강해져야 한다고 거듭 외쳤다. 넘어지면 안 된다.그 무엇이 짓누르는 것 같다.기지개를 펴고 싶다.불끈 주먹을 쥐고,뛰쳐 나가 마음껏 소리 지르자.마음껏 저 응어리진 가슴을 풀어헤치자.그리고 힘껏 어디로든 달려가 보자. 내 아버지를 죽인 저 독재여.너도 그렇게 끝내 가고 말 것을.너는 너를 향해 이십 년을 겨누다가 마침내 견디다 못해 쏘고 말았구나. 이튿날,선원 회계는 선주가 서둘러서 낮에 끝났다. 선원들 몇은 집이 외지여서 하루 이틀씩 허락을 받고 떠나기도 하고,또 몇은 송금을 하기도 하였다.어떤 선원은 시내 구경이나 하자고 나갔고,나가면서 저녁엔 또 술집을 가자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선주는 이 번 입항이 다른 때보다 늦은 관계로 출어를 바삐 움직이어야 한다면서 외지에 가는 선원들은 기일을 지키라고 몇 차례 당부하였다. 결국 영민은 혼자 배에 남게 되었다.선주는 잠깐 다녀가면서 괜히 낮술 하지 말고 배를 잘 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영민은 인근 가게에 나가 사 온 신문을 보고 라디오를 들어 보지만 종잡을 수 없는 안개 속의 정국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였다.오히려 그는 보도 그 자체에 대한 불신이 자꾸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생각에 신문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리고,선실 구석 한 쪽에 둔 노트를 끄집어내어 몇 글자 끄적거리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선옥의 이름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는 빈 선실을 맴돌다 제 흥에 사그라지고,물결에 흔들리는 배에 실린 자신은 그저 덩달아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세상 어느 한 구석,무덤 속같은 작은 배안에 그렇게 외롭고 슬프게 들어앉아 있는 것이었다. 잡아! 놓치면 안 돼! 어디선가 갑자기 들려 오는 괴성이 영민의 귀를 찢기라도 하듯 점점 가까이 다가섰다. 영민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저 쪽이야! 억센 사내들의 구두 소리가 방을 울렸다. 오빠,빨리 피해! 이어 울부짖는 선옥의 목소리.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그리고 영민은 빠져나가야 할 길을 먼저 찾아내야 했다.눈에 익은 골목길이 머리를 스쳐갔다.길은 있었다. 아니,뭐해? 오빠,어서 피하지 않고! 선옥은 영민을 붙들어 일으켰다.영민은 어서 피해야겠다고 따라 일어섰다. 방을 나와 집을 나섰다. 뒷골목이 안전하였다.전혀 낯설지 않는 그 골목길.바로 휴학했을 때 살았던 산 동네 으슥한 길이었다.내내 변하지 않은 그 길.아마 수 십 년이 지나도 변할 것 같지 않은 동네의 비탈진 길.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쫓는 사람의 구두 소리는 갈수록 커죠 오는데,자신의 발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오빠! 오빠! 또 부르는 선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어느새 그 소리는 어제 들었던 전화의 목소리로 변하고 영민은 눈을 떴다. 꿈이었다. 영민은 긴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일어나 담배를 찾아 물었다. 왜 그런 꿈이 보였을까.불길한 조짐은 아닌가.혹시 선옥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아니야,그럴 순 없어.조금만 시간을 끌면 다 잘 될 일인데... . 영민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더러 선원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갔다.눈 부신 가을 하늘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흩어진 선구들이 눈에 띄어 바로 세웠다. 속 호주머니의 돈 봉투를 만져 보았다.줄포집에 가야 되는데.저쪽 길 선구점과 소금집 사이로 들어가면 금방 다녀 올 수 있었지만,저녁에 가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고 적당히 술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앞서,그는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눈에 보이는 선창은 평온하였다.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죽었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둣, 일하는 사람은 제각기 일에 열중이었고,다음 출어에 대비하여 휴식을 취하는 사람은 한가하게 자기들 시간을 갖고 있었다.무엇 하나 지난 번과 다를 바 없는 선창의 광경이었다. 단지 자기 하나 살고,자기 식구 먹여 살리면 될 일이지 그런 것은 어떤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서로 이야기하다 그런 말이 나오면 듣기만 하고 말 뿐이고,더 이상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알아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그러려니 하면서,그럴 수도 있다고만 생각하는 것이지,그런 것이 안타깝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관심 밖의 일이 되어 있었다. 저녁 늦게서야 선원들 몇이 돌아왔다. 시내에 나간 선원들은 오랜만에 비싼 술집에 가서 술도 마시고 제법 기분을 낸 것 같았다. 영민은 밤 하늘 높이 뜬 초열흘 달을 바라보며 걷다 문득 고향 생각이 났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모습.고향에도 저렇게 고요하게 달빛을 내리고 있겠지.내 집 마당에도 가득 내리고 있겠지. 영민은 줄포집을 찾았다. 손님이 없으면 줄포댁과 이야기도 하려 했는데 전과 다름없이 분주하였다. 아주머니,안녕하셨어요? 어? 이게 누구여? 내,말은 들었는디,칠성호 만선혓다며? 늘 저녁이 되면 약간 취해 있는 줄포댁은 여전하였다. 예,다행이죠. 어머니 소식은 어떻게 알어 봤어? 예,어제 선주 집에서 전화해 보았습니다. 어떻다고려? 그렇게 걱정할 병은 아닌가 봅니다. 참 다행이구마이. 제가 빌린 돈 갚아야지요,이제. 벌써 셈 봤는개벼? 선주 어른이 서둘렀습니다. 그 양반은 수단이 좋아서,일도 시원 시원허게 헌다고 이 바닥에 자자헝게.그 황 영감 만선 헌 기분은 뭐라고려? 뱃머리 빠진 거 보고 신났겄네. 그러셨겠지요. 한 잔 허야지? 막걸리 헐랑가? 줄포댁은 술 주전자를 내오고 대접 잔에 술을 따랐다. 선주 마누라도 운수대통혔다고 난리였겄구만.근디 그 집안은 무슨 말을 들어갖고 서울에다 땅 사고 집 사고 돈을 번디야? 좌우지간 되는 놈에 집 구석은 뭘로 혀도 끄떡 없당게. 줄포댁의 말을 듣고 있으면 가늠이 서지 않았다. 어떨 때는 괴팍하기도 하고,또 어떨 때는 한없이 마음은 다시 없이 보이었다.영민은 갑판장의 말대로 아마 생계 수단이 그리하여 속 마음은 감추고 겉으로만 그럴 것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지금 드릴게요. 꾼 돈? 예. 손님들 본게 좀 기다려.한 잔 더 허고. 그럴까요? 당겨진 통금 시간 때문에 술 손님들은 한 사람씩 자리를 떴다. 금세 줄포집은 정적이 감돌 정도가 되었다. 줄포댁은 탁자에 가 술자리를 치우고 장부에 몇 가지 옮겨 적었다. 저도 그만 가 볼게요. 그려? 줄포댁이 다시 영민의 자리 옆에 와 앉았다.영민은 돈 봉투를 내밀었다. 바로 갚아서 다행입니다. 한 잔 더 줄까? 아뇨,저도 가 봐야지요. 그 때,문이 열리면서 열 살 남짓한 사내 아이가 허겁지겁, 엄마! 하며 달려들었다.줄포댁은 놀란 표정으로, 왜 왔어? 상옥아,무슨 일이야? 아이를 붙잡았다. 아이는 숨을 돌리지 못하며 겨우 소리를 내었다. 상희가,또,열이,많아. 뭐? 줄포댁은 영민에게 받은 돈을 손에 쥔 채, 가만 있어.여기 문은 닫고 가야지.상옥아,쫌만 기다려. 영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해 하는 줄포댁을 보고 줄포집을 나섰다. 그러나,그는 그대로 당황해 하는 그들을 보고 배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희라는 아이에게 원래부터 무슨 병을 앓고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스쳐 갔다. 제가 뭐라도 도와야 하나요? 아냐,괜찮응게 얼른 가.우리는 일로 갈랑게. 서두르는 그들을 보고 있는 영민은 우선 그들을 따라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뒤를 쫓았다. 어디 가? 우리 애헌티 가 볼라고? 예,저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 보세요. 그들은 급히 움직였다. 얼마 뒤 줄포댁의 집에 이르렀다. 줄포댁은 방으로 달려들어가 상희를 불렀다.영민도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상희는 이제 일곱 살 정도로,겉으로 보아도 몸이 무척 수척하게 보였다.열에 시달렸는지 기운이 전혀 없이 보였다.누워서 줄포댁만 쳐다보고 아픔을 이기려 애썼다.상희는 줄포댁이 주는 약을 먹고 한참 뒤에 잠이 들었다. 그 시간까지 줄포댁은 꼼짝하지 않고 상희 옆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어쩌다 한 번씩 눈물을 글썽이며 한숨을 쉬었다.상옥도 계속 상희 옆에 있다가 줄포댁이 심부름을 시키면 재빠르게 거들었다. 상희에게는 어머니면 충분하였다.영민은 괜한 걸음을 하여 통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음의 불편만 준 것이 미안하였다.그러나, 줄포댁은 만약에 상희가 더 심하였다면 영민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영민은 세 식구룰 바라보면서,세 식구의 서로 아끼고 위하는 마음과 끈적한 사랑을 체험하였다.줄포댁의 모습은 얼마 전에 보았던 줄포집의 작부가 아니었고,든든한 아들과 착한 딸을 가진,그러니까 영민으로서는 근래 겪지 못한 모성애를 자신에게 보여 준 훌륭한 어머니였다.영민은 상희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그래도 괜한 걸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였다. 잠시 뒤에 벽시계가 열 시를 알렸다. 그러자 바로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왔다. 줄포댁의 말에 의하면,상희는 벌써 몇 달 전부터 가끔 열이 나고,몇 번은 한밤중에 의식이 저하되고 하여 식구들을 당황하게 하였는데 그 때마다 진통제로 넘겼고,실제 진통제를 먹으면 감쪽같이 나아,그래서 곧 낫겠거니 하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지내왔다고 하였다.그래도 한 번은 병원을 가야겠다 한 것이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요사이 들어서는 상희가 발열이 생기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줄포댁은 상옥이도 재우고 마루로 나왔다.밤 바람이 차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지만 영민은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이대로가 편하니 마루에 앉아 있겠다고 대답하였다. 줄포댁은 마루의 문을 닫고 부엌에 가서 차를 끓여 내왔다. 죄송해서 어떻게 하지요. 죄송은? 내가 고맙고 미안혀서 어쩔 줄 모르겄는디. 이거 통금이라 가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 금방 풀릴 거여.우리 상옥이 방에서 잠깐 눈 좀 붙이믄 좋을턴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방에 들어가 주무세요.피곤하시잖아요? 아녀,그려서 통금 풀리믄 갈라고? 그래야지요.별 방법은 없을 것 같고... .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영민은 남은 차를 마셨다.그리고 담배를 피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호주머니를 뒤졌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줄포집에서 급하게 나오다 그만 담배를 깜박 잊었다는 생각이 났다. 담배? 아,예. 줄포댁은 머뭇거리는 영민에게 선반에서 담배 한 갑을 찾아서 주었다. 혹,술 생각 안 나? 한 잔 허고 싶어? 술 있나 볼게.어디 있긴 있을 건디. 영민은 썩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담배에 불을 붙였다. 춥고 헌게, 몸 좀 녹일라믄 술이 좋잖어? 아니에요.견딜만 해요. 또 서로 말이 없었다. 영민은 찬기를 느끼고 팔짱을 꼈다.그리고 영민은 무슨 말인가를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유리창 밖 밤 하늘이 시선에 들어왔다.아직 달빛은 푸르기만 하였다. ...아주머니 고향은 줄포에요? 나? 줄포댁잉게 줄포겄지.왜?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 바람따라 물따라 오다 본게. 줄포댁도 담배를 꺼내 피웠다. 애들 아버진, 어디 계세요? 우리 상옥 아버지? 줄포댁은 고개를 돌려 창 밖 밤 하늘을 쳐다보았다. 영민은 쓸데없는 것을 물었다 싶어 이내 말을 돌렸다. 저기,아주머니,건강은... . 우리 상옥 아버지,잘 살아 있지. 예? 영민은 그 말에 의아스런 시선으로 줄포댁을 보았다. 얘기허믄 길을 턴디. 줄포댁은 아이들 방을 쳐다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이거 우연찮게 이런 자리서 마주허고 앉어 얘기헐랑게 이상허구마이. 제가 괜한 걸 물었나 보죠? 그렇게 해서 시작한 이야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그녀가 여상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직장 동료의 소개로 지금의 상옥 아버지를 만났는데,그녀보다 두 살 위였던 그는 당시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며 어렵게 공부하는 야간 대학생이었다.그는 매사에 성실하였으며 순수한 성격을 지녔었다.두 사람은 몇 번 만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는 징집 영장이 떨어졌고 그녀는 그의 뜻에 작별을 하여야 했다.삼 년이라는 세월은 짧은 게 아니었다.그러나 그녀는 그를 잊을 수 없어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 면회를 갔고, 두 사람은 다시 예전처럼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한편 그녀의 집안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결혼을 서두르지 않으면 혼기를 놓친다는 생각에 급기야 군 생활 중 혼인을 하게 하였다.그녀의 집에서는 원래 내키지 않는 결혼이라 하여 돌아 보지도 않았고, 시집도 어려워 들어가 살수가 없는 그녀는 따로 살림을 차려야 했다. 그 때 고생하며 혼자 낳은 아이가 상옥이었는데,그 애를 낳기 전 그는 고생하는 그녀를 위하여 고민한 끝에 월남전에 자원을 하였다.머나먼 이국 땅에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간 그는 그런 대로 상당한 기간 별 탈없이 지내면서 잘 버티어 갔고, 적지 않은 벌이는 그에게 큰 위로가 되어 희망을 갖게 하였다. 그가 열심히 맡은 바 임무에 수행하고 있다는 편지가 몇 번 오고 난 어느 날,그녀는 그의 본국 귀환 통보를 받게 되었다. 기간이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돌아온다는 것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그녀는 그가 귀국하고 난 훨씬 뒤에야 만나서 비로소 알았지만,그가 전역과 함께 송치된 곳은 정신 요양원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여린 그가 삶과 죽음이 연속적으로 엇갈리는 전쟁터에서 적응하지 못하고,자기가 죽으면 고국의 처자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강박 관념을 가졌을 것이며,그런 책임감과 정신적 부담이 곧 발작 증세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사랑하는 그녀의 정성과 스스로의 의지로 몇 년 만에 정상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때가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를 또 옭아맨 것은 자신의 무직과 아내의 고생으로 인한 불안감과 죄책감 같은 것이었고,결국 얼마간의 행복도 잠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얼마 가지 않아 남편의 재발 징후가 나타나자 그녀는 남편의 치료를 위해 상옥이를 친정에 보내고 남편과 함께 기도원에 가 생활을 하였다.그러나 그녀의 정성만큼 별 차도는 없었고 거기서 그녀는 상희를 갖게 되었다.그리하여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도로 정신 요양원에 보내 놓고 혼자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상희를 낳았다.이제 그녀는 아이를 키우고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그래서 생각다가 결국 시작한 것이 이 항구로 나와 자리를 잡은 술 장사였다. 본시 그녀는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여러 장사를 해 왔던 터라, 남들이 보기에 힘이 들어 보이는 술 장사도 몇 년 하다 보니까 이내 익숙해졌고,또 술도 하게 되었으며 담배 맛도 알게 되었다.술과 담배를 하는 것은 때로 자신의 인생에 한을 남긴 것들을 잠시나마 잃어 버리려 하는 작은 몸부림이었고,괴로움을 잊는 유일한 도피처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지금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요양원에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줄포는 남편의 고향이며,그래서 간판을 뿡인 것이고 간판 이름대로 자신의 이름은 줄포댁이 된 것이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고생이 많으셨겠어요.혼자 그걸 감당하시다니.오늘 저는 많은 걸 깨 달았습니다. 다 그러고 사는 거 아니겄소? 영민은 줄포댁의 평상시 반말투가,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할 때부터 많이 가라앉아 있었음을 느꼈다.그리고 자기에게 돈을 선뜻 빌려준 그 까닭도 알 만하였다. 장사하실 때 보면 이따금 말도 함부로 하시는데, 오늘 이야기 들어보니까는 전혀 그러실 분 같지 않거든요. 그려? 그렇게 안 하믄 장사 이 바닥에서 허겄소? 반말도 혀야 나 함부로 못 볼 거고 그 지 긋지긋헌 외상 값도 제 때 갚을 거고.처음에 좀 뭐 혔는디 자연히 되더랑게. 그러고 보니까,아주머니는 가게에서 힘 내고 할 때의 모습이 더 좋은 것 같은데요. 어지간히 달도 기운 듯하였다. 힘 내야 허고말고.장사허다 보믄 별사람 다 겪응게.마음 걱정 있다가도 이런 사람 보고 살고,뜻대로 안 되믄 또 저런 사람 보고 살고.그렁게나 이 팔자 견디고 살지. 저 여기 떠나면 아주머니 잊지 못할 거에요. 나? 나 같은 거 뭐허게 못 잊고 허겄소?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깨닫는 것도 많아요. 근디 이거 내 얘기허다 본게 내 얘긴 혔네. 저야, 뭐 할 만한 이야기가 있어야지요. 내 정확헌 건 모르느디, 한석씨도 마음 고생은 말어.털어버릴 건 죄다 털어버리고.눈 깜짝 허는 게,세월이라고 안 그려? 그 즈음에 통금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새벽을 가르고 울려 왔다. 제 6 부 안개 정국 안개 정국은 계속되고 있었다. 선옥은 고향에 다녀온 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자신의 신변 문제와 도청 문제를 걱정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어 마음은 놓고 있었다.혹시 영민의 집에서 지낸 것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저들의 집요한 추적에 의해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어 저들로부터 도청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 하였지만, 며칠이 지나도 어떤 조짐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 안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속에 선옥은 졸업 연주를 마쳤다. 그녀는 한 가닥 실낱 같은 기대로 강당 안을 기웃거렸지만 영민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지난 해 연주회 때 영민이 와서 장미꽃 한 송이를 주며 살짝 웃었던 모습만을 떠올리며 위안을 하여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선우가 와서 축하해 주었고 그것으로 만족하였다.무엇보다 무사히 졸업 연주를 끝낼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졸업을 앞두고 자기에게 다가올 문제가 선옥은 여간 부담이 가는 게 아니었다.교사 임용에 따른 순위 고사 응시를 놓고 벌써부터 집안과 틀어져 있었고, 그것은 또 결혼과도 맞물려 있어서 가까운 시일 내에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게다가 영민은 영민대로 연락은 오지 않고 갑갑한 마음으로 날짜만 보내고 있었다. 선옥은 일단 시험 준비는 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그리고 영민의 처지를 생각하면, 부모의 뜻대로 결혼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어떻게 하든 순위 고사에 응시하여 자신의 꿈이었던 음악 교사를 하면서 시간을 버티고,그래서 영민의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심산이었다.또,선옥은 이 문제로 부모와 부딪혀도 자신의 뜻을 세우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너 지난 번 영민이 일로 시골에 다녀왔어도 길게 말하지 않았어.이제 그 정도면 되었어.내 말 들어 제발. 엄마, 또 그 얘기 꺼낼 거야? 결정을 내야 하는 일 아니니? 몇 번을 말해야 내 뜻을 알 거야? 아빠도 마음의 결정을 내렸어.그 동안 큰 소리 안 치시고 가만히 지켜보셨지만, 너 이러는 것 보시면 속 상해 하시니까, 이 자리에서 나하고 얘기해서 끝내자.응? 엄마,한 말 또 해야 돼? 나 시험 공부 중이야.합격해서 발령나면 교사 할 것이고,결혼 은 추호도 생각이 없고.이게 다야. 네가 믿는 게 대체 뭐냐? 믿다니, 내가 뭘 믿고, 안 믿고 할 게 있어? 너 지금 영민이 때문에 꼼짝 못 하는 거 아냐? 너 겉으로 말은 안 해도,네 마음 속은 변 한 게 없잖아? 엄마,말 나온 김에 영민 오빠 얘기하자.영민 오빠 어제 오늘 만난 거 아니고,엄마도 아는 것처럼 몇 년을 같이 지내 왔는데 영민 오빠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서 여기서 선보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내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너 반드시 영민이 아니면 안 된다는 얘기 아냐? 누가 그렇대? 영민이 오빠가 나타나 그 때가 되어도 결혼을 생각해도 늦지 않다 그거지. 만약에 내가 여기서 결혼하면,영민 오빠한테 나는 뭐가 되는 거야? 그럼 너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래? 곧 새 정부가 들어서고 하면 풀릴 거야.그러면 대학도 구제가 될 것이고, 졸업도 할 수 있 을 거야.그러면 되잖아. 얘가 소설을 쓰는구만. 다른 집들은 부모가 자식한테 진다고 그러는데... . 그래서? 이애 말하는 거 봐.너 영민이가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냐? 막말로 해서 집안이 괜 찮냐, 그렇다고 돈이 있냐? 난 이해가 안 가.영민이는 연애로 끝내고,당장 결혼 생각해. 엄마 오늘 정말 실망했어.속물 같아. 뭐라고? 막말까지 안 해도 그건 내가 다 아는 건데 그런 걸 꼭 얘기해야겠어? 이것아,네가 하도 앞뒤가 꽉꽉 막혔으니까 그렇지.만약에 너,일이 제대로 안 풀리면 그 때 가서 어떻게 할래? 내 나이 아직 멀었어.걱정 안 해도 돼,엄마. 금방이다,너. 만약,내가 영민이라면 너한테 그러겠다. 뭐라 할 건데? 네 갈 길 가라구. 엄마,영민 오빠는 분명히 돌아오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야.잠시 때가 안 좋아 이상하게 일이 꼬여 이렇게 된 것뿐이야. 죄 없으면 자진 출두해서 해결할 걸 가지고 왜 피신하는 거니? 말했잖아.일이 이상하게 꼬여 그랬다구. 무슨 그런 말이 있니? 어쨌든 아빠가 언제 한번 시간 내서 이야기할 거야. 엄마,영민 오빠 살인자 아냐. 누가 사람 죽였대? 그런데 마치 살인이라도 한 사람 같이 대하고 있잖아. 애가 끔찍한 얘기하네. 우리들 인생 창창한 사람들이야.엄마,희망 좀 갖게 해 줘.영민 오빠,나마저 고개 돌리 면 비참해져. 그리고, 너 순위고사, 그거 어쩔 거야? 당연한 거 가지고 또 왜? 오늘 나하고 싸우려고 작정했어,엄마? 벌써 원서도 냈어. 기어코 시험 보겠다? 그럼 그냥 집에서 놀라는 거야? 그러니까,변한 건 하나도 없는 거네? 어릴 적부터 엄마 아빠하고 약속했던 거잖아. 하여튼 난 모르겠어.아빠하고 얘기해. 엄만 항상 아빠한테 얘기하라 하고 끝내. 자식한테 부모가 져야 한다며? 내가 무슨 힘 있니? 난 너한테 말로는 이길 수 없어. 한 달이 지나도록 영민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철저하게 피신하기 위해서라지만 선옥은 영민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날씨는 갈수록 추워질텐데 피신해 있는 곳은 지내기에 불편이 없을까 신경이 씌었다.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는,지난 번 보냈던 송금 봉투의 주소대로 찾아가고 싶었지만,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 포기하고 언제까지든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나 불안한 것은 학원가에 떠도는 이상한 소문이었다. 시민들이 이른 바 군사 정권에 대한 염증을 갖고 있는데도 한편에서는 새로운 군사 세력이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그런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옥에게는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었다.그렇게 되면 영민의 피신은 더 시일이 걸리고,더 어렵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학교에 나가 보면 학생들은 민주 정부의 조속한 수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무렵,선옥은 자신의 뜻대로 교사 임용 순위 고사에 응시하였다. 그리고 선옥은 전화라도 한 번씩 울리면,혹시 하는 마음으로 달려가 받기도 했지만 영민에게서는 여전히 소식은 없었다. 순위고사를 마치고 며칠 뒤,선옥은 밖에서 아버지와 저녁 식사 약속을 했고,자신의 장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선옥은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이 번에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선옥아,시험 발표는 언제 나니? 내년 일 월이에요. 네 엄마하고도 몇 번 이야기를 했다만,결혼은 어떻게 할 거니? 아빠,전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저는 지금 결혼보다 먼저 할 일이 있 다는 걸 아빠도 알고 있잖아요. 음악 선생님 말이니? 어렸을 적부터 하고 싶었고,또 집에서도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벌써부터 마음을 정 하고 있었어요. 엄마한테 들어 알고 있다만,영민이 때문에 그러는 거라는데. 아빠,영민 오빠 문제와 결부시키지 마세요.엄마도 꼭 제가 교사를 하겠다 하면 영민 오빠 문제와 연관을 시키는데, 단지 저는 나이가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는 거에요.또 마음의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결혼만 강요하시니까 답답하고 짜증만 나고 그래서 엄마와 말다툼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럼 이 아빠에게 다 터 놓고 한번 말해 봐라. 뭘요? 영민이하고 결혼할 생각이니? 아빠,지금 제가 어떻게 그 오빠와 결혼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건 당장 교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고, 그게 영민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말하자면 네 엄마 말대로 영민이를 기다리기 위해서 우선 결혼을 피하고 보자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 예.저는 그렇게 급하게 결혼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알았다.그게 네 솔직한 생각이라면 좋다. 선옥 아버지는 얼마 뒤에 신중히 생각을 한 듯 말을 꺼냈다. 선옥아,이건 노파심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 선옥은 잠시 긴장이 되었다. 너도 알 건 다 알 나이가 되었으니까 눈 앞에 보이는 뻔한 실수는 안 하겠지만,엄마도 나 도 걱정되는 것은 영민이와의 문제다.언젠가 한 번은 이야기하려고 했던 건데 네가 마음 쓰 는 것이 안 되어 보여서 미루었다.나도 영민이를 잘 알고 있고,영민의 생각도 모르는 게 아 니다.네가 지난 번에 시골에 다녀온 것도 이 아빠는 다 이해하고 넘어갔다만,이제 그만 관 계를 끊었으면 한다.요즘 시국이 어수선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만,아무리 영민이가 좋은 사람이고 너한테 잘해 준다 해도,애비로서 자식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거니까 내 말을 명 심하고,다른 식구들이 이 일로 신경을 쓰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다.정말이지,나는 네가 영민이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어떤 불상사가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이야.주위에서 하도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고 또 세상이 너무 무서우니 말이다. 선옥은 듣기만 하였다. 선옥 아버지는 선옥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선옥이 그 정도로 이야기를 했으면 충분히 이해를 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 후로,선옥은 일단 영민의 문제에 대해 부모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부모의 뜻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착잡하였다.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초조해졌다.영민의 일은 어떻게 전개될지 앞이 캄캄하게만 느껴졌다. 첫눈도 내렸다. 그 동안 눈이 날리긴 했어도 쌓이지 않았는데,어느 날은 제법 눈이 쌓였다. 온 세상 추하고 부정한 것들은 모두 저 눈 속에 아주 영원히 숨겨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순수가 땅에 떨어지고 비겁이 활개를 치는 암흑 같은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믿고 의지하여야 하는지, 그저 인간은 가식을 두르고 목숨에 쫓기며 사는 존재였다. 선옥은 눈이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고 우울한 마음을 달래었다. 영민과의 일들이 주마등되어 눈 속에 피었다 사라지고 자꾸 선옥의 눈망울을 적시었다.영민과의 지나간 일들은 가슴 아프고,외로운 적이 많았지만,돌아다보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었고,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그런 자취들이 마치 긴 시간 꿈인데도 깨어나면 금세 떠오르지 않는 것같이 어렴풋이 느껴지면서, 자신이 그 어떤 것에 흔들리고 있음을 의식할 때는, 선옥은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고 수없이 되뇌었다.그리고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앞으로 일어난다 해도 견뎌야 한다고 다짐하였다.영민에게 있어 자신의 의미는 단지 앞으로의 동반자가 아니라 생명 같은 희망이고,그를 그 긴 방황에서 꿈을 갖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렇게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겨울 밤은 끝없는 적막을 실어 나르고 선옥은 영민을 지키는 사람처럼 그 위를 서성거렸다. 한 번 시골에 있는 김 목사에게 전화를 해서 영민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다만 그 이야기만을 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다소 건강을 회복하여 간다는 소식에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영민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다. 가끔 눈이 많이 내렸다. 외로운 사람에게 눈이 내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시간을 보낼 수 있는 볼거리가 생기는 일이었고 괜히 마음이 설레어서 좋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보내지도 못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낙서를 하는 습관도 생겼다. < 눈 오는 날,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절망할 일이다. 눈 오는 날,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토록 하얀 세상에 그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눈 오는 날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대의 사랑이 하얀 세상에 빛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사랑하는 사람을 두고,이렇게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조차 끊고 산다는 게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일인가?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리는 그 고통을 그대는 알고 있는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 진 시련이라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이건 시련이 아니고 형벌이다. 나는 이 눈 오는 날, 그대 위하여 어느 길 모퉁이에서 언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는 것인가? > 지난 번에는 세 달 이상이나 연락이 끊겼어도 겪지 못했던 일들이 하나씩 생겼다. 그 때는 그렇게 영민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지 않다가 처음 생긴 일이라 멋모르고 지나쳤지만,이 번은 이상하게도 지루하고 힘이 들었다.하기야 그 때는 학교 생활에 분주했고 교생 실습으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그런 대로 시간을 넘길 수 있었지만,지금은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 선옥으로 하여금 당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연말이 다가오고 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캐럴이 울렸다.사람들은 제각기 기억하는 사람에게 카드를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아름 선물을 보내고 있었지만, 선옥의 방에는 슬픈 음악만 간간이 들려 왔다. 그러니까 선옥은 영민으로부터 소식이 끊긴 지 거의 두 달을 견딘 셈이었다. 선우만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선우는 선옥의 방을 들어오는 횟수가 늘었다.그 동안 사실 입시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서로 맞대고 앉아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였었다. 다른 날도 그랬지만 선우가 방에 들어왔다.두 손에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누나, 차 마실래? 웬일이니? 오늘은 차까지 끓여서 대령하고. 내가 누나 팬 아냐. 넌 여자 친구 없니? 이런 때 시간 있을 때 만날 만한 여자 친구 말야. 여자? 그런 거 필요한 거야? 뭐? 누나 연애하는 거 보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아. 얘 말하는 거 봐. 그렇잖아.요즘 날마다 속 상해 하는 누나 보면 불쌍하다니까. 내가? 그런데 영민이 형 연락은 아주 끊어진 거야? 두 달이 넘었잖니.영민 오빠가 연락을 하고 싶어도 못 하고 있는 거야. 고생이 많겠다. 그러게 말야.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는지 안타까울 뿐이야. 시골에 계신 어머니는? 그 때 갔다 온 뒤로 김 목사님하고 두 번인가 통화했는데 좀 나아지셨대. 누나,대학에 들어가면 데모 많이 해? 데모? 데모만 하다 졸업하는 학생도 있을 정도야. 누나도 해 봤어? 그럼. 누나도 할 줄 알아? 다른 얘기해. 누나,졸업하면 음악 선생님 하는 거야? 지난 번 시험 보았잖아. 학생들이 누나한테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말이지? 왜 안 되니? 키도 이만하면서? 문교부에서 키 보고 교사 발령 내는 줄 아니? 하여튼,누나 봉급 타면 이 하나밖에 없는 동생 용돈 책임지는 거지? 나에겐 그게 가장 중 요하니까.그런데 만약 시험 떨어지면 어떻게 해? 네 걱정이나 해.너는 대학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그렇고,엄마랑은 누나 결혼시키려고 그러던데. 야,너도 이 누나가 이 나이에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마 아빠 뜻이 너무 완강하시니까 그렇지. 난 이해가 안 돼. 누나는 사실 나이가 문제가 아니고,영민이 형 때문에 그런 거지? 또 무슨 얘기하려고, 이게. 영민이 형 그렇게 좋아? 너 오늘,나 약 올리려고 작정한 거 같다? 엄마가 당장 내일이라도 선보라면 죽어도 안 나갈 거야? 너 그만 해. 누나,알았어.그만 할게.요즘 계속 누나가 울적해 보여서 장난 좀 친 거야.난 누나 편이고, 영민이 형 원래 좋아했어.누나 힘들고 하면 날 불러. 나도 이제 다 컸으니까.누나 위로도 해 줄 수 있어. 빈말만 들어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선옥은 선우와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시름을 잊어도 보았다.또 남에게 말 못 할 것들을 조금이라도 털어놓은면 마음의 위안이 되고 하듯이, 선옥은 이런 자리에서 선우에게 영민과의 지나간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한 해가 끝나가는 전 날이었다. 그 동안 방 안에서만 틀어박혀 지내고 있었는데,선옥에게는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겨울이었지만 참 쾌청한 오후였다.눈 부신 하늘을 보고 집을 나선 것이었다. 혼자 한참을 걸었다.바람은 차가웠지만 햇살에 젖는 기분이 상쾌하였다. 선옥은 걸으면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영민과 가끔 들렀던 찻집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찻집은 그대로 거기 있었다. 자기를 알아 보는 주인 여자의 미소를 받고,늘 그 찻집에 들르면 앉았던 자리에 가 앉았다.마침 그 자리가 비어 있어 다행이었다.둘러보아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항상 그렇듯이 연인들의 자리에는 환한 웃음이 있고 즐거운 대화가 있었다. 언제나 샹송이 흐르는 이 찻집을 영민은 좋아했다.영민은 꼭 여기에 오면 마주보고 앉지 않고 곁에 앉았다.영민은 자기가 아는 음악이 나오면 선옥이 들릴 정도로 작게 따라 부르곤 하였고,이따금 영민이 선옥의 어깨에 팔을 올리면 그녀의 마음은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선옥은 차를 마시고,그 시간들 속에 잠시 젖어 갔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선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막 찻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이선옥씨죠?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두 사나이가 선옥의 양팔을 붙들었다. 예? 선옥은 반사적으로 이상한 생각에 그들을 뿌리치려 했지만,몸이 말을 들지 않았다.그들은 바로 옆에 대기해 놓은 까만 지프에 선옥을 강제로 태웠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가 움직였다. 아니,이거 왜 이러시는 거에요? 선옥은 자기에게 닥쳐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었다. 다 각오하고 있었을 거 아냐? 한 사나이가 점잖게 말하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에요? 아저씨들은 누군데 아무 이유 없이 선량한 시민을 납치해 가는 거에요? 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 국가에서 이게 무슨 일이에요.저 내려 주세요.집에 가 봐야 한단 말이에요. 선옥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면서 저항했다.아무 소용이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말들이 튀어나왔다. 눈물이 났다.울고 싶었다.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영장? 민주 국가? 이것도 물이 들었구만. 순순히 따라가면 돼.네가 몸 성히 돌아가려면 우리에게 협조하면 되는 것이고,알았어? 차는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선옥은 이런 것이 절망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저들이 분명히 수단을 가리지 않고,자기로부터 무엇인가 캐내려 할 텐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궁리해야 했다.남의 일같이 느껴지던 일이 바로 코앞에서 일어나 것이었다.너무 쉽게 닥친 일이었다. 얼마큼 달린 뒤에,운전하는 사나이가 말했다. 눈 감겨. 선옥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정중히 모시는 거야,아가씨. 아직 멀었어.마음 놓고 있어.불안해 하지 말고.이러는 우리도 좋아서 하는 일이 아냐.여기 이 사람들 다 아가씨같은 동생도 있고 그래.도와 주면 서로 피곤하지 않아. 아저씨,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에요? 가면 알아.이 시대의 진정한 지성인이라면 한 번쯤은 갔다 와야 한다면서? 바로 거기야. 하지만,가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어. 아가씨가 여기서라도 잘 이야기하면 차를 돌려 댁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으니까. 우리 사실 그 동안 박영민이를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선옥은 눈에 감긴 채 사나이들의 소리만 들었다. 대충 어디에 있는지도 감은 잡고 있어.단,정확한 것을 알아야 일이 쉬어질 것 같아서 이 방법을 택한 거야. 아주 교묘하게 우리를 따돌렸더군.전화 한 통화도 안 하면서 그럴 듯하게 위장하고 말야. 아가씨를 어떻게 알아낸 지 알아? 서로 주고 받은 편지도 있다는 거 다 알아. 첩보가 다 들어오게 되어 있는 거야.너희들이 아무리 피해도 우리 부처님 손바닥이라구. 우리가 아가씨 고향에서부터 미행한 거 모르지? 선옥은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알고 하는 이야기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그러니까 아마 그들이 수사하면서 경험했던 것을 영민의 신상에 맞춰 적당히 말하는, 말하자면 그들의 상투적인 듯한 인상이었다.그러나 선옥은 모를 일이었다. 아니,왜 그리 외출도 안 하신 거야? 우리 마음만 먹으면 아가씨 집 다 수색할 수도 있어. 집안 시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런 거야.집안까지 알게 되면 골치 아프잖아.안 그래? 편안하게 귀가하려면 우리 빨리 끝내자고. 다 왔는데,박영민의 거처를 안 대겠다? 쥐도 새도 모른다는 말을 모르시는군. 보기보다 고집이 센데?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군. 그들의 말은 짜증이 날 정도로 듣기 싫었다.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괴력이 있는 것 같았다.그들은 일부러 그렇게 해서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옥은 마음 속으로 영민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대답은 없었다.오직 저들의 간악한 조작이나 함정에 말려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만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공포가 서서히 다가 오고,선옥은 기운을 잃어 갔다. 극한 상황에 이르면 모든 것을 일찍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 보았는데,지금의 자신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스쳐 갔다. 이윽고,차는 속력을 줄이고 어디에선가 섰다. 그리고 선옥은 그들의 힘에 끌려 계단을 지나 어느 방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그들은 선옥을 의자에 묶어 앉혔고,그들은 밖으로 나가는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고요가 흘렀다. 선옥은 이제, 밖은 저녁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집에서는 지금쯤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다.그리고 아까부터 어떻게 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는지 답을 찾으려 했지만,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단지,무조건 모른다고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저들이 어떤 수단으로 자기의 답을 강요해도. 얼마 후 한 사나이가 돌아왔다. 그는 선옥의 눈을 감은 헝겊을 풀었다.순간 어둠이 시선을 가로막았다. 선옥 앞의 책상에 사나이가 걸터앉아 있었다.그리고는 새까만 문서를 넘겼다. 선옥은 주위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사나이만 한 번 쳐다보고 고개를 떨구었다.어떻든 마음을 굳게 가져야 했다. 이선옥씨,인간 대접 받고 싶지? ...... . 여기까지 안 와도 해결할 수 있는,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왜 질질 끄는 거야? 아저씨,제가 뭐에 대해서 안다는 거에요? 며칠이고,여기 있고 싶어? 무엇으로 저를 지목하고 이렇게 하시는 거에요? 아가씨를 찾아내는데 몇 달 걸렸지.지난 번 시골에 갔을 때,그 쪽에서 들은 얘기부터 해 봐.아가씨,우리가 물어 보는 건 다 근거 있는 거야. 저는 그냥 제 고향이라 다녀온 거지,다른 일은 없었어요. 박영민이 집은 왜 갔어? 박영민이 소식을 전하러 간 거 아냐? 저는 거기서 열다섯 살 때까지 살았어요.지금도 친척이 있고 그래서 고향에 한 번 가 본 거에요.저는 그 때 인사하려고 박영민씨 집에 들른 것이고, 저는 박영민씨가 수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던 거에요. 그런 사람이 거기서 잠까지 자고 와? 아가씨가 거기서 자야 할 이유가 없잖아. 가 봤더니, 박영민씨 어머니께서 병으로 고생을 하시는 거였어요.연세가 많으셔서 거동도 여간 불편하신 게 아니었어요.어렸을 때 저를 예뻐해 주셨고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그런 거 지,다른 이유는 없었어요.아저씨,저는 정말 몰라요.그리고 저희 집에서는 제 결혼을 준비하 고 있어요.확인해 보세요.당장 내일 약혼자와 만나게 되어 있고 양가에서는 곧 약혼식을 올리기 위해 준비 중이란 말이에요.이 상태에서 저를 박영민씨에게 연결을 시키고 해 보세 요.저는 파혼을 당하게 되고,제 인생은 누가 책임을 지는 거에요. 선옥은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문제의 해결 방법을 어떻게 결혼 쪽으로 가게 되었는지 자신도 몰랐다.기왕 이렇게 나오게 된 바에야 계속 결혼 문제로 이 미궁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자신은 속으로 묘한 대책이라고 스스로 놀랐다.그녀는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아가씨,수작부리지 말고.여기 전화해 볼까? 해 보세요.그렇다면 이 전화만 확인되면 풀려 주실 거에요? 선옥은 여기서 말을 그치면 사나이에게 다른 구실을 줄 게 분명하여 이내 말을 이었다. 아저씨,저는 여자에요.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혼을 앞에 두고, 다른 남자 문제로 이렇게 이 런 데에서 취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저에게 여자의 멍에인 과거를 짊어지게 할 거에요? 우리 아빠 혈압도 높고 제가 이런 데에 있는 줄 알면,금방 쓰러질 분 이에요.그리고 우리 아빠도 다 아시겠지만 공무원이세요.딸을 수배 받는 남자와 만나게 할 것 같아요? 물론 저는 박영민씨를 잘 알고 있어요.그러나 어려서부터 같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알았고,서울에 와서 우연히 한두 번 보았을 뿐, 서로 연락하며 지냈던 게 아니에요. 아저씨,저는 지금 할 일이 많아요.집에 가야 된단 말이에요.결혼에다가... . 이 아가씨 말이 끝이 없구만.결혼은 결혼이고,여기서 그 얘기하자는 게 아니고 아가씨가 박영민의 거처를 알고 있고 실제 그 동안 서로 연락을 했다는 거야.우리는 아가씨가 시골에 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관찰했어.순위고산지 뭔지 시험 보러 간 날도 우리는 다 알고 있 었고 그 날 오후에 연행할 생각도 했어.알아? 선옥은 사나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간 도청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시골에서 돌아온 날 저녁에 영민과 통화를 했던 기억이 전광석처럼 머리를 스쳤다.선옥은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선옥이 얼른 사나이의 말을 가로챘다.사실 그 뒤로는 어떤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친구들한테 들은 바로는 아저씨들이 도청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요.박영민씨와 제가 서로 연락하든가요? 말해보세요! 선옥이 도리어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갑자기 사나이가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아가씨,생각보다 당차구만.여기가 어딘지 알고 함부로 입을 놀려! 아가씨,이거 왜 이래? 우리가 아가씨를 지목할 땐 그만큼 의혹이 있어서고, 확신이 서니까 데려 온 거야.우리들 한가해서 아가씨 붙들고 이러는 거 아냐.박영민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고,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가씨뿐이야.그의 대학 친구들도 만나 보고 했어.다들 아가씨를 기억하고 있었어. 고향 선후배 명단을 통해 알아 보았지만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활동했더군.그만큼 골수분자 였던 거야.그의 형도 한때 그러다 이민 떠나고.그의 부모는 이북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도 거동 수상한 행적이 있었고 말이야. 저와는 상관이 없어요.다 모르는 얘기에요.그 친구들도 난 만난 적이 없고,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같은 고향이라도 저는 한 번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그 집엔 왜 갔어? 실은 시골 교회 목사님을 뵈었는데,박영민씨 어머니께서 혼자 고생하신다며 천식인가 하는 병으로 시달리신다는 거에요.그 목사님은 혼자 사시는 박영민씨 어머니를 교인으로서 돌보 고 계신 것이었지요.염려가 크시더라구요.그래서 목사님 부탁도 있고,마침 학교도 휴교 상 태였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거였지요.저녁에 친척 집에 들렀다가 가서 잔 것일 뿐이에요. 저는 그게 무슨 죄가 된다면 억울한 일이죠.박영민씨 어머니는 기침을 하시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셨고,옆에서 자는 저는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어요.오히 려 저는 그 때 박영민씨의 거처를 알고 있었다면 그의 어머니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그리고 자수하라고 했을 거에요. 사나이는 선옥의 이야기를 잘 듣는 편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상대에게 할 말만 하게 하고 단서를 제시하고 하였을 텐데,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 달 이상을 관찰하다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자 궁여지책으로 선옥을 통해 영민의 거처를 알아내려 했던 것 같았다. 선옥은 순간적으로 그 동안 철저하게 행동하며 자신을 지켜 왔던 영민에 대해서 그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들의 선옥에 대한 취조는 끝없는 설전으로 계속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선옥은 당당하게 대처하는 것이 방법이라는 것을 터득하였다. 사나이는 큰 소리를 치며 협박도 하였다.다시 회유책을 썼다.사나이는 몇 번 주먹을 쥐고 책상을 수없이 내리쳤다. 얼마 지난 뒤에는 다른 사나이가 들어왔다. 그 사나이는 다짜고짜 고문 운운하며 공포 분위기로 몰아갔다.또 그는 협조를 하지 않으면 귀가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 선옥은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그럴수록 정신을 차리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굴욕적인 언행으로 자신을 취조한다 해도 참고,자기의 뜻은 분명하게 세우려 애를 썼다.그리고 자신이 먼저 한 말과 나중에 하는 말이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시간이 갈수록 선옥은 악이 받쳤다.눈물까지 흘리며 애원도 하였다.자신의 억울함을 누누히 강조하였다.도대체 무엇을 알아야 말을 해도 할 것이 아니냐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들은 다시 논리적으로 상황을 제시하면서,한사코 왜 영민의 집을 갔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선옥은 앞서 한 말을 반복하였다.그리고 마침, 선옥이 근래 영민 어머니의 건강 여부를 묻기 위해 김 목사와 통화한 것이 있었는데, 아마 그들이 그것을 도청했을 것이라는 추정으로 그 통화의 내용을 당신들도 확인했을 것이 아니냐면서 거꾸로 따졌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지 않았다. 잠시 뒤에 어떤 사나이가 식사를 갖다 놓고 나갔다.선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들도 충분히 심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귀가를 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옥은 그 말을 듣고 실의에 빠졌지만 앞으로 더 힘든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들은 얼마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꽤나 긴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였다.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피곤이 오는 느낌이었다.여기서 벌써 쓰러지는 것은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눈을 부릅떠 보기도 하였다. 다시 시간은 흘렀다. 또 누군가 들어왔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가씨,오늘 밤 고생 좀 해야겠어.이건,제 삼자가 정황을 들어 봐도 아가씨가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사건 난 지 팔 개 월이 넘어가는 것 같은데 피신도 힘들 어.특히나 정국이 이런데 무사할 거 같아? 아가씨,내가 제안 하나 하지.우리 같이 박영민이 있는 곳에 가서,아가씨가 설득을 해서 자수하게 할 수 없겠어? 그게 박영민이를 살릴 수 있 는 길이야. 선옥은 자신이 할 말은 전에 다 했다며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잠 못 자는 고통이 얼마나 큰 지 알아? 그리고,여자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도 많을 텐데.연 말과 새해는 가족과 같이 해야 할 거 아냐? 선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선옥은 시간이라는 것도 어느 한 자리에서는 흐르지 않고 멈춰 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제 7 부 하선 칠성호는 그 뒤로도 몇 번 출어를 하였고,매번 벌이는 괜찮은 편이었다. 선주는 벌이 때마다 회계를 빠짐없이 해 주었고,선원들은 집안 살림에 다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되면서 바다는 가끔 풍랑이 심했지만 별 사고 없이 지내온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영민에게 있어 더 다행스런 일은 선주의 각별한 배려로 승선자 임검을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때가 때인 만큼 어느 때보다도 승선자 명부 확인과 단속이 철저했지만,배의 숫자에 비해 임검 경찰의 인력이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미리 선주가 적당히 손을 써서 안전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 선주의 한결같은 배려는 영민의 행실이 바르고,어떤 일을 맡겨도 자기 일처럼 성의를 갖고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었다.게다가 굳이 하나 더 붙인다면 일종의 신의 같은 것이었는데,처음부터 이상하게 연민의 정에 끌려 맺은 인연을,선주는 쉽고 냉정하게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선주는 영민이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자기가 있고 싶을 때까지는 있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선주는 영민으로 인하여 불이익이 생긴다 해도 수배에 대한 문제는 모르는 것으로 하면 될 일이라 여겼기 때문에 특별히 사고만 나지 않으면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을 듯싶었다.또 문제라고 해야 관할 파출소에서 해결이 가능한 것이어서 마음을 놓기로 하였다.만약에 이제 와서 영민에게 그만 배에서 내려라 하면, 갈 곳이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니까 선주는 오직 인간적으로 영민을 데리고 있는 것이었다. 계속 영민은 누구에게도 연락을 끊은 채였다. 아직은 시간을 버티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머지않아 새 정부가 들어서면 어떤 기회는 분명히 올 것이라는 기대만 갖고 있었다. 그리고,어머니는 그 뒤로 건강을 회복했을 것이라는 마음을 굳게 갖고 항상 속으로 어머니의 무사함을 비는 기도를 하였다. 그러면서,영민은 출어 횟수가 늘어날수록 선원 생활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그 동안 선원 중에는 몇 사람이 배를 갈아 타기도 했지만,영민은 새로운 사람들과도 가까이 지내려고 술 자리도 하고 대화도 가졌다.그는 이제 선원을 자신의 직업처럼 생각하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었다.그러나 영민은 무엇보다도 우선 몸이 아프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서 좋았다. 입항할 때마다 영민은 줄포집을 찾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레 자신이 술 값을 내야 할 자리는 꼭 줄포집을 찾아가 매상을 올려 주었다.지난 번 일로 사정을 알고 난 뒤부터 영민은 줄포댁 집안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본디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라도 도와 주고 싶어하는 그였기 때문에 영민은 출어를 나가서도 줄포댁에 대한 생각을 좀처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번은 우연히 줄포집 앞에서 상옥을 만나게 되었는데,상옥이 먼저 영민을 알아 보고 인사를 하였다.영민은 왠지 상옥이 반가웠고,갑자기 상희가 보고 싶은 생각에 그 길로 곧장 상옥과 같이 집으로 갔다.상희의 건강이 염려가 되었고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상희를 만나자,처음에는 상희가 자꾸 영민을 가리켜 누구냐고 작은 소리로 상옥에게 물었다.상옥은 엄마가 잘 아는 아저씨라고 대답을 하였고,그러자 상희는 영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살짝 웃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이들과의 만남은 영민으로 하여금 마음의 평화를 갖게 하였다.이 마음의 평화는 영민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고 마음 한 구석에 이미 아이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영민 자신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 뒤로도 몇 번 줄포댁의 집에 들렀다.영민에게는 병으로 인해 아이들 곁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가엾게 보였고,또 입항해서 할 일이 없을 때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은 일이 되었다. 아무튼 그 일은 영민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기쁜 일이 되었다.아이들이 좋아하는 자장면을 사 먹이고,극장 구경도 시켜 주며,눈이 왔을 땐 눈싸움도 하며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좀처럼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는데,상옥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술 장사를 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따돌림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영민이 그 말을 듣고, 아이들이 더 안타깝게 느껴져서 아이들에게 용기를 갖게 하기 위해 여러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상옥아,넌 오빠니까 동생에게 약하게 보이면 안 돼.더구나 동생이 건강이 좋지 않다니까 네가 더욱 강하게 보여야 돼.알았니? 또,동네 아이들이 너희와 놀려고 하지 않는다 해서 속 상해 하지 마.네가 먼저 그 아이들에게 한 명 씩 잘 대해 주고 관심을 가져 봐.한 명씩 친 구 하다 보면 모두 어울릴 수 있어.이 아저씨가 볼 땐 상옥이가 상당히 어른스럽게 보이는 데,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잘 헤쳐나갈 거야.그리고,상옥이는 엄마가 하는 고생이 헛되지 않도록 공부 열심히 하고,상희는 항상 아빠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알았지? 아저씨,고마워요.아저씨 말씀 잊지 않을 게요. 상옥은 나이에 비해 대견하게 보였다.그것은 일찍부터 혼자 고생하는 어머니로부터 보고 듣고 배워서 얻은 힘인 듯하였다. 그런데 아저씨는 집이 어디야? 상희가 궁금했는지 한참 생각하고 물었다. 아저씨? 서울.너희 서울 가 보았니? 아니요. 그럼 이 아저씨가 겨울 방학하면 서울 구경 시켜 줄까? 정말요? 정말이고 말고. 야,신난다! 영민은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천진난만을 발견하는 순간,영민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그것은 쉽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희들 있지,그런데 말야,이 아저씨가 배를 타기 때문에 글쎄, 될는지 모르겠다. 영민은 그렇게 넘겼지만 상희가, 그럼, 아저씨 시간 나면 구경시켜 줘, 꼭. 하며 팔을 붙들고 말하기에 영민은 거절하지 못하고, 그래. 하고 말았다. 그러자 상옥이, 상희야,아저씨가 시간이 없으시대잖아.나중에 엄마한테 시켜 달래자,응? 하며 상희에게 눈치를 보냈다. 영민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지만 더 말을 꺼내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그리하여 대신, 그 대신 이 아저씨가 크리스마스 때 선물할게.됐지? 영민은 그 말로 아이들의 실망을 가라앉혔다. 크리스마스 때,아저씨? 상희의 얼굴 빛이 이내 환하게 변하였다. 다음에 배 들어와서 너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면,맛있는 것도 사 주고,상희 갖고 싶 어하는 인형도 사 줄게. 아이,좋아라.아저씨,꼭 약속 지켜야 해. 상희는 마냥 좋아서 손뼉을 쳤다. 영민은 그렇게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준다는 게 즐거웠다.이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병을 주고 고통을 겪게 한다는 것이 그저 야속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참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상옥의 숙제를 거들어 주었다.상옥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숙제를 돌봐 주는 영민을 좋아했다. 지금까지 엄마도 아빠도 숙제를 돌봐 준 적은 없었어요.숙제 내준 문제를 못 풀어서 어떨 때는 쩔쩔맬 때도 있었어요.같은 학년 동네 애들한테 물어 보면은 일부러 안 알려 주기도 했어요. 그래도 상옥이는 공부 잘 할 거야? 잘은 못 해요. 상희는 내년에 학교 들어가면 잘 할 수 있겠어? 나는 오빠보다 더 잘 할 거야. 응,그래야지.그리고 몸 건강하고. 아저씨,이젠 별로 안 아파. 그러면서 상희는 상옥의 책상 서랍에서 노트와 연필을 꺼내 와서는 영민 앞에 펼치고 무엇인가 써 내려갔다. 아저씨,나 글씨 잘 쓰지? 참,글씨 이쁘게 쓰네.상희도 정말 공부 잘 하겠구나. 영민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어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피신하여 숨어 지내는 자가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마음의 안정이 이렇게 포근한 것이 라는 것을 절감하였다. 아저씨,저녁 식사 여기서 하고 가세요. 우두커니 앉아 있는 영민에게 상옥이 말하였다. 벌써 저녁 때가 되었구나.네가 밥상 차리려고? 예,아저씨는 상희 산수 문제 좀 내 주세요.제가 금방 저녁 상 차려 올게요. 내가 먹을 밥도 있어? 그럼요,미리 알고 낮에 밥을 많이 해 두었어요.잠깐 기다리세요.아저씨가 가져 온 생선 구워 올게요.엄마가 지난 번에 맛있게 간을 해 두었어요. 오빠,나 생선 구운 것 많이 줘야 돼. 알았어. 영민은 입항할 때마다 생선을 챙겨 줄포댁 집에 가져다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갑판장이 지난 번에 영민의 줄포댁 집안 이야기를 듣고 신경을 써 주었다.갑판장은 다른 사람들이 알면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몇 번 하기도 했지만,그래도 영민은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알아 주는 갑판장이 고마웠다.입항한 뒤 챙겨 놓은 생선도 갑판장이 어디에 쓸 데가 있다며 가져가는 척하다가 사람들이 보지 않은 데에서 영민에게 건네주었던 것이다. 상옥은 김장한 김치와 구운 생선을 얹어 밥상을 차렸다. 영민은 밥상이 무거워 낑낑거리는 상옥을 보고 가 상을 받아 마루에 놓았다. 너 아주 숙달이 되었구나.이젠. 밥상 들 때 부엌 문턱 조심해야겠더라. 아저씨,진짜로 오빠 거기서 그 전에 넘어졌다. 상희는 그게 재미나는지 크게 웃었다. 상희야,네가 어서 커서 상도 차리고 해야 돼.알겠니? 남자가 밥상을 차리는 것보다는 여자 가 밥상을 차려야지.그렇지? 자,밥 먹자. 아저씨,나는,오빠같이 넘어지지 않을 자신 있어. 정말? 응,아저씨,나 클 때까지 우리 집에 와야 돼? 응? 영민은 상희의 물음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그 세월이 언제 가서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될 것인지 그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였다. 아저씨,뭘 생각하세요? 반찬 없어서 그러세요? 응? 아니. 상옥의 말에 숟가락을 떴지만 입맛을 느낄 수 없었다. 분명히 자신은 지금 그 무엇인가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을 쫓고 있는 그 어떤 실체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는 말만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며 식사를 마쳤다. 저녁이 지났지만 영민은 아이들만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상옥이 연탄을 갈아야 한다는 것을 그만 잊어 버리고 말았다.영민이 나가서 꺼뜨린 연탄불을 다시 피워야 했다.그는 상옥에게 자기가 한다면서 나섰다. 옆에서 쳐다보던 상옥은, 연탄불을 꺼뜨리면 엄마가 제일 싫어해요. 엄마가 추운 데서 들어오시면 따뜻하게 쉬실 수 있도록 해야지. 아저씨와 같이 있으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었나 봐요. 오빠,엄마 올 시간 안 됐어? 상옥은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다 됐어.지금이면 가게에서 나올 시간이야. 영민은 자리에서 일어서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얘들아,이제 갈게,아저씨. 그러자 상희가, 아저씨,그냥 자고 가면 안 돼? 하며 일어서는 영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배에 가야지.그리고,아저씨 내일 바다에 나가. 영민은 상희의 초롱한 눈빛을 두고 집을 나섰다.상옥은 밖에까지 따라 나섰고 깍듯이 인사를 하였고,고맙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밤 공기가 차가웠다.겨울 날씨 답지 않은 날씨가 그 동안 며칠 이어졌는데 내일부터는 추워질 것 같았다. 골목길을 나섰다. 거리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영민은 제 세상처럼 보였다.그 어떤 누구도 자신이 누리는 이 자유를 막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마음속에 외쳤다. 어? 한석씨 아녀? 줄포댁이었다. 일 끝내고 오시는 거에요? 그런디 어쩐 일이대? 그녀에게서 술내가 풍겨 왔다. 아이들하고 놀다가 오는 길입니다.아이들이 기다리는데 어서 가셔야죠. 배에 가는가 본디,너무 늦었네. 그녀는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다. 술을 팔려고 그렇게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야 하는 그녀가 측은하게 보이었다. 한석씨,그렇잖어도 한 번 만나 얘기헐라고 그렸는디... . 예? 영민은 주춤하였다. 줄포댁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한석씨,이 야밤에 갈 디는 없응게 여기서 허는 말인디,우리 애들 한석씨 왔다가 배 타 고 나가면 특히 우리 상희가 한석씨를 찾어.나,애들이 한석씰 너무 좋아할까 봐 걱정 돼서 그러는디 인자 그만 왔으믄 혀서. 영민은 그 말에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한석씨,애들이 정들면 어떡허나 싶어서 그려.애들이 하두 외롭게 커 갖고... . 줄포댁은 그 말을 남기고 집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영민은 그저 돌아서 가는 줄포댁을 쳐다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어떤 말 한 마디도 못 한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그렇다면 자신의 행동은 아이들을 만난 때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줄포댁이 말한 대로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영민은 씁쓸하기만 하였다. 다음 날,칠성호는 아침 물에 출항하기로 되어 있었다. 선원들은 일찍부터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출어를 위해 마무리 준비를 끝냈다.선주가 오면 얼음 공장에 들러 얼음을 싣고 출항할 일만 남겨 두었다. 날씨는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였다.선원들은 서로 날씨가 좋아 다행이라고 말하였다. 영민은 올 마지막이 될 출어를 앞두고,지난 늦은 봄부터 배에 올라 지금에 이른 것을 돌이키니 감회가 새로웠다.자신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작업복이 이제는 평상복처럼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번에 갔다 오면 이 한 해도 저물 것이고,새해가 오면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영민도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에 마음 한 편에 설레임도 없지 않았다. 아닌게아니라 몇 년 전부터 틈만 나면 사람들은 대망의 팔십 년을 떠들어대었는데,정말 그 세월이 눈앞에 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가슴이 설렐만도 하였다. 그러나,영민은 그러한 구호가 결국은 사람들 앞에 다가오는 팔십 년이라는 숫자일 뿐이지,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는 허상임을 알고는 갑자기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따지고 보면 국민 소득이 얼마며,수출이 얼마라는 그 수치 놀음은 불투명한 정국과 함께 대망의 세월에 실망만 드리운 채,곧 팔십 년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선창은 어수선해졌다. 많은 배들이 기관을 움직이고 출어를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선장은 선주가 왜 늦는지 알 수 없다고 혼잣말을 하였다.선원들도 웬일인지 모를 일이라고 수근거렸다.아무래도 얼음 공장에 갔다가 출어하는 배들이 많아서 순서가 지체되어 그런가 보다고 한 마디씩 붙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주가 나타나 배에 올랐다. 선장,얼음 실러 가자구. 선주는 선장에게 말하고 이내 영민을 찾아 영민에게 다가갔다. 영민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한석이 자네,이 판은 배에서 내려야 할 거 같은디. 영민은 태연한 척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선주는 남이 들을까 봐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이 판에 불법 승선자 단속헌다고 그러네.심헐 거 같다는디.해상에서 해경도 단속허고 헐 랑개벼.어떤 배들은 면허 없는 선장,기관장 태워 갖고 사람 없어 출항도 못허구 그런디야. 영민은 고개을 끄덕이며, 예,알았습니다.선주 어른께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그런데,당장 선원이 부족해서 어떻게 하 죠? 지금 그게 문제여? 배 얼음 실을 때 나랑 같이 내리드라구.알겠지? 그려도 다행 아녀? 이 렇게 미리 알았응게 대책이 선 거지.바다 한가운디서 그렸어 봐.큰일 났지.안 그려? 배는 얼음 공장 앞에 섰고 얼음을 실었다. 영민은 선주와 함께 도리 없이 배에서 내려야 했다. 영민은 선실에 들어가 옷 몇 가지만 가방에 챙겨서 들고 내렸다. 그러고 난 뒤,선주는 영민의 등을 두드리며 한 보름 집에서 쉬라고 몇 번이고 말하였다. 바로 배는 출항하였다. 선주는 만선을 기약하며 선장에게 겨울 바다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서너 번 당부하였다.그리고 두 사람은 떠나가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서 선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 잔 허고 들어갈쳐? 아침부터 약주 하시려고요? 자네 기분도 있고 헌게,줄포집으로 가드라구이.가는 길이고 헌게. 줄포집에요? 영민은 그 말에 대번 어제 밤 일이 떠올랐다. 왜,싫은겨? 우리 배 사람들 그 집 잘 가는 거 같든디. 예.그냥 가죠,뭐. 두 사람은 꽤 먼 길을 걸음으로 줄포집에 이르렀다. 줄포댁은 어제 일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다른 때와 똑같이 영민을 맞이하였다. 아니,칠성호 아까 나가는 거 봤는디 선주 영감까지 어쩐 일이시대유? 줄포댁,여기 막걸리 한 되만 내 와. 영민은 말이 없이 앉아 있고,선주가 술을 시켰다. 한석이 자네,이 판에 고향에 갔다 오믄 좋겄네. 줄포댁이 술상을 차리다 선주의 말에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렇지 않아도 배는 나갔는데 영민은 떠나지 않았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민은 선주의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는데 줄포댁이 술상을 보아 왔다. 선주 영감님,아침이 아직 일러서 안주가 시원찮어 어떡허죠? 줄포댁은 자꾸 나만 보믄 영감,영감 허는디 듣기 싫네.새파랗게 젊은 사람헌티 영감이 뭐 여? 근디 요새 장사는 잘 되지? 여자도 안 두고 허는 장산디요.뭐,이냥 먹고 살믄 됐지요. 영민은 줄포댁과의 어제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을 돌았다.줄포댁을 쳐다보기도 그렇고 마음이 무겁고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리 신경을 쓸만한 일도 아닌데,자신이 너무 민감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줄포댁도 자기한테는 직접 어떤 말도 하지않는 것이 기분이 묘했다. 이것은 마치 선옥이와 다투고 나서 서로 말도 하지 않고 못마땅하여 몹시 성나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사람 무슨 생각여? 술 잔 비었구만. 아,예. 영민은 선주의 술잔을 채우고 자기의 술잔을 비우고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 사람 벙어리 된 거여? 기분이 안 좋은개벼? 젊은 사람이 그런 일로 낙심허긴. 아닙니다.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근디 왜 기운이 없냐,이거지. 선주는 영민의 술잔을 술을 부으며 어린애를 다루듯 영민을 다독거린다. 술 한 잔 더 허고 다 잊어 버려.응? 줄포댁은 일을 하면서 한 번씩 영민을 쳐다보았지만,그녀도 내심 어제 일로 영민에게 술이 취해서 실언이나 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는 눈치같기도 하였다. 필시 여느 때 같았으면 말을 붙여도 여러 번 하였을 텐데 그냥 모른 척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아마 그녀는 영민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겨 말을 붙이기가 어색해서 말을 꺼내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끝내 두 사람이 줄포집에서 나오기까지 영민과 줄포댁은 서로 눈만 두어 번 마주쳤을 뿐,말은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영민은 선주에게 오후에 집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하고 줄포집 앞에서 헤어졌다. 선주는 같이 집으로 가자는 말을 몇 번 했지만 영민은 바람 좀 쐬고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러나 영민은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선창은 아직 출항하지 못한 배들이 출항을 서두르고 있었다.배들은 기관 소리를 울리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신의 일에 분주히 움직이며 활기에 넘쳐 있었다. 그는 한참 어판장 옆에 선 채 바다 쪽을 내다보다,마음 한 편에 줄포집을 찾아가 줄포댁을 만나 어제의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사실 영민은 줄포댁을 만나 먼저 어떤 말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오히려 서로 더 서먹서먹해질 것 같아 나중에 보기로 하였다.어떻게 보면 이런 일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한 번 웃고 말 일이었다. 영민은 줄포집이 보이는 선구점 근처에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영민은 처음에 이 항구에 왔을 때 들른 적이 있는 큰 길 건너 다방을 발견하고 그리로 가기로 하였다.가서 몇 시간 앉아서 흩어진 마음을 추스르고 오후가 되면 선주 집에 갈 생각이었다. 다방 안은 조용하였다. 이른 시간이라 서너 사람이 자리를 하고 있었고,가운데 석유 난로가 벌겋게 몸을 달구고 있었다. 영민은 날씨가 춥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을씨년스웠다. 영민은 난로 옆에 가까이 가 가방을 옆 의자에 놓고,마실 차 한 잔을 시켰다. 차를 마시면서,그는 눈앞에 보이는 가방의 덩치가 생각보다는 크다고 느껴졌다.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엄연히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것이었다. 삶의 짐이라고나 할까.그 동안 한 몸으로 견디어 온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선원 생활을 하며 힘에 부쳤던 일들이 하나하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후가 되어 영민은 선주 집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 배가 들어올 때까지 숙식을 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당장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영민은 상희의 생각이 떠올랐다.마음을 돌려야 했다.상희가 보고 싶었다.지금 쯤이면 상옥이는 학교를 가고 틀림없이 상희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영민은 갈 곳이 생겼다.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지금 여기서 자신을 반겨줄 사람은 상옥이와 상희밖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영민은 걸음을 재촉하였다.빨리 가서 상희의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는 줄포댁의 집에 가면서 줄포댁의 어제 밤 이야기가 생각났지만,우선 상옥이와 상희를 만나지 않는 것은 아이들에게 배신감처럼 느껴져 그냥 가기로 하였다. 영민이 집에 들어서자,상희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가 뜻밖에 나타난 영민을 보고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저씨,배 안 나갔어? 배는 나갔는데,아저씨한테 사정이 생겨서 아저씨만 배에서 내렸어. 영민은 상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아저씨,우리 집에 내일이랑 또 올 수 있는 거야? 상희는 큰 눈을 굴리며 또박또박 말하였다. 응.오빠는 하교에서 아직 안 왔지? 오빤 세 시 넘어야 와. 혼자 방에서 뭐 하고 있었어? 책 읽고 있었는데 참 재밌다. 무슨 책인데? 이거? 동화책. 상희는 영민에게 자랑처럼 책을 들어 보였다. 상희는 학교도 안 다니는데 글씨도 다 배워서 알고,상희는 참 예쁘구나. 오빠가 가르쳐 준 거야. 추운데 방에 들어가자. 영민은 상희를 안방에 들어가게 하고 자기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상희는 방문을 얼어 놓고 영민에게 자꾸 들어오라 하였지만 영민은 웬일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어제 줄포댁이 한 말 때문일까.자신은 그것에 대해서 정도 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저씨,아저씨는 동화책 중에서 뭐가 제일 재밌어? 아저씨는 으응,성냥팔이 소녀. 아저씨도 그거 봤어? 정말 재밌지? 응.그런데 너 점심은 먹었니? 영민은 상희가 혼자서 점심을 차려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이 되어 물어 보았다. 오빠 오면 오빠가 줄 거야. 세 시 되어서? 응.지금까지 꼭 그랬어. 배 안 고파? 영민은 상희가 자꾸 안쓰러워 물었다. 괜찮아.아저씨,배 고파? 내가 밥 차려 줄까? 아니. 영민은 상희가 나이에 비해 생각하는 게 깊어 기특하다고 여겼다. 아저씨,들어 와,안 춰? 아저씬 여기가 좋으니까 방 문 닫고 어서 책 봐. 한낮의 동네는 한적하였다.남향으로 난 마루에는 겨울 같지 않게 따사로운 볕을 내리고,맑은 하늘에 퍼지는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영민은 그대로 마루에 걸터앉은 채,이따금 상희가 동화를 소리내어 읽으면 들어 주기도 하고,어려운 말이 나오면 알기 쉽게 가르쳐 주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뒤,영민은 생각을 하다가 상옥이 올 때쯤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선주 집에 가서 선주를 만나,앞으로 보름 정도를 어디서 어떻게 지낼 것인지 이야기를 해 둬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저녁이 다 되어 가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선주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영민은 선주 집에 들어서 먼저 선주 부인을 보고 인사를 하였다. 아니,한석이,자네 몸이 불편혀서 이 판은 쉬기로 혔다며? 많이 아퍼? 예? 예. 영민은 잠시 머뭇거리며 어설프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선주가 인기척에 얼른 나와 말을 가로막았다. 응,왔는가? 어서 들어와.아프면 쉬어야지. 예. 영민은 선주 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선주를 따라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어쩌다 한 번씩 쓴 방인디 깨끗허게 청소혔어.지낼만 헐 거여. 선주 어른께 신세만 지니 이걸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 그런 말 말어,이 사람아.마누라헌티는 아프다고 얘기혔응게 아픈 척이라도 혀야 돼.알았 나? 그러고, 마누라가 뭣 좀 혀 주면 잘 먹고,그 동안 뱃일 허느라 고생혔응게 쉬기도 혀야 지,안 그런가? 고맙습니다.끝까지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니... . 선주네는 식구라고 해야 선주 내외와 아직 시집 가지 않은 둘째 딸이 있을 뿐이어서 언제나 조용하였다. 거기다가 선주 부인은 닷새 이상을 서울에 다녀오느라 집을 비워서, 어떨 때는 영민이 혼자 집을 지키는 경우도 있었다.영민은 선주 내외가 하는 이야기를 언뜻 들어 알았지만,이 번에도 또 땅을 사게 되었는데 선주 부인이 약속한 날짜가 되어 중도금을 치르고, 간 김에 큰 딸네를 들르고 며칠 묵고 온다며 떠난다는 것이었다. 선주 부인이 없는 날은 둘째 딸이 식사 준비를 하고 영민은 안방에서 선주와 겸상을 하기도 하였는데 둘째 딸은 거의 일주일이 가도록 영민에게 말 한 마디를 붙이는 일이 없었다.가끔 곧 결혼할 사이라며 집으로 어떤 사내를 데려 오곤 하였지만,영민에게 인사를 시키기는커녕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영민의 생각으로는 아마 둘째 딸이 자기를 하찮은 뱃사람으로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영민은 오히려 그런 것이 좋았다.어떤 것에도 세세히 신경을 쓰지 않아서 좋았던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영민은 하루 하루 보내는 것이 훨씬 따분하고 지루하였다. 선주네로 들어오는 신문을 보고 잠깐 세상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그러나 신문에 나오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얼마만큼이 진실이고 또 얼마만큼이 거짓인지 구분이 서지 않았다.세상사 끊고 살라는 기관장의 말만 새삼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리고,영민은 거의 한 달 반 이상을 선옥과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는 셈이었다.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선옥의 생각도 많이 해 보았지만 그저 안타깝고 슬프고 괴로울 뿐,그 무엇으로도 마음을 이기거나 달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 말대로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는데 그것을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괴롭기만 하였다.그렇다면 선옥도 지금 그것을 경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지는 것도 영민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장 서울로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도리 없는 일이었다.저 안방에 가면 마음 놓고 어디든 전화를 할 수 있는데,바보같이 벙어리 냉가슴 앓듯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는 도저히 따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그럴 때마다 영민은 한계에 부딪치는 것을 수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줄포댁의 집은 상희가 혼자 집에 있을 때만 잠시 들렀다. 상희로부터 오빠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영민은 상옥이가 있을 때 한번 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그리고 줄포집은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런 차에 바람을 쐬러 선창에 나갔다가 우연히 수협 앞에서 일을 보고 나오는 줄포댁을 보았다. 아주머니 아니세요? 그러나,줄포댁은 영민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그저 못 본 척 돌아섰다.그러자 영민은 어색한 표정을 하고 그 자리에 서서 걸어가는 줄포댁의 뒷모습만 보았다. 그런데,돌연 줄포댁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영민을 향해 말하였다. 한석씨,잠깐 나 좀 봐. 그녀는 긴장되어 잔뜩 굳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민은 무슨 말을 하든 언젠가는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따라 줄포집에 들어섰다. 안은 사리 때라 그런지 출어로 인해 손님이 없었고,청소도 깨끗이 되어 있었다. 줄포댁은 영민이 앉은 자리에 술을 가져 오고 마주앉았다. 그녀는 무엇인가 준비한 말을 하려고 영민의 술잔에 술을 붓고 자기도 술을 따라 마셨다. 영민은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우선 궁금하게 여겼던 것부터 물었다. 한석씨 무슨 일로 배 안 탔어?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영민은 자연스럽게 말하였다. 객지에서 아프믄 안 되지. 그렇게 심한 게 아니니까... . 한석씨. 예? 지난 번에 한 번 술 취허고 헌 말 있었지? 기분 나뻤던개벼? 아뇨. 다 이해혀.그런디 나 요즘 얼마나 가슴 아픈 줄 알어? 뭔데요? 그녀는 다시 술을 부어 단번에 마셨다. 무슨 다른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았다. 한석씨 왔다 가면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손가락질허는지 알어? 영민은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예? 서방은 요양소에 쳐박아 놓고 서방질헌다고 그려. 예? 영민은 다만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한석씨 고마운 줄 알어.허지만 우리 이대로 살고 싶응게 우리 애들헌티 마음 쓰지 마.몇 번 한석씨 왔다간 뒤에, 동네 사람들 나 술장사헌다고 그러믄 다 그렇고 그런다믄서 입방아 를 찧는 거 나 못 참어. 영민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아주머니,진정하세요.아주머니 마음 다 알고 있습니다.저는 단지 아이들에게만 신경을 쓴다고 그랬는데... . 한석씨,이만 나 얘기헐게.나 욕허지 마. 줄포댁은 자리에서 일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영민은 또 한 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는 줄포집을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것만 머리를 맴돌았다.그리고 하나,상희의 크리스마스 선물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여기서 영민이 분명하게 느낀 것은,자신의 순수가 너무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것이었고,또 그것은 여지 없이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제 8 부 가족 선옥이 온다간다 말없이 집을 나간 지 나흘째 되는 저녁. 소식이 없는 선옥 때문에 집안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처음에는 연말이라 친구들과 오랜만에 어울리려니 생각하다가 하루를 넘겼고,새해 첫날 저녁이 되어도 연락이 없자 식구들은 막연하게만 영민을 찾아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집에서 영민의 문제를 두고 싫어하는 줄 알기 때문에 허락이 여의치 않아 그냥 말없이 영민이 있는 곳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여보,전화라도 할 앤데, 너무 이상해요.행방불명이라고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처음에는 영민의 문제로도 식음을 포기하고 눕다시피한 선옥 어머니는 이제 다른 걱정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선옥 아버지가 말했던 대로,영민과의 관계로 선옥이 수사기관에 붙들려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좀 기다려 보자고. 만약에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떡 하죠? 무슨 일이라니? 선옥이는 곧 돌아올 거야. 얘,선우야,누나 친구 집에 한번 더 전화해 볼래? 엄마,지금까지 기다렸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바로 그 때였다.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서 대문으로 나갔다. 선옥 어머니는 현관에 나가 밖을 내다보려는 참이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 대문이 열리면서 누가 들어오더니 그만 기운 없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누나? 엄마! 아버지! 누나에요! 선옥 어머니는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뭐? 누나라고? 선옥은 선우의 부축으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선옥 어머니는 선옥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며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너 이게 무슨 일이냐,응? 대관절 어찌 된 일이야? 선옥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누구의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여보,이 애 무슨 일 있었던 거 같아요. 선옥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선옥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선옥의 겉옷은 성했으나 속옷은 상당히 찢겨 있었고,드문드문 긁힌 상처가 보였다. 너 어디 있었던 거야? 응? 정신 좀 차려 봐.선옥아,아픈 데는 없어? 선옥 아버지가 선옥을 붙들었다. 그러나,선옥은 온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그 어디인지 모르는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엄마,엄마... . 선우야,가서 물 좀 떠 와. 선옥 어머니는 가슴이 떨려 왔다. 예.그런데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엄마,나 자고 싶어. 선옥은 모든 게 힘에 겨운 듯 작게 말하였다. 너,붙들려 갔던 거지? 선옥 어머니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물었다.선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놈들,우리 딸이 무슨 죄가 있다고.이런 짓까지. 선옥 아버지는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선옥아,그러니까 내가 뭐라대,응? 그 놈하고 연락 끊으랬잖아.이것아. 선옥은 어머니와 선우의 부축으로 방 침대에 옮겨졌다. 선옥 어머니는 따뜻한 물 수건으로 선옥의 얼굴과 몸을 닦으면서 상처를 보고는 분통이 터져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십 몇 년을 애지중지 내 생명처럼 키워 온 자식인데 세상에 이럴 수 있는 것인가. 옷을 갈아 입히면서 다시 분을 삭이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하였다. 선옥은 저절로 눈이 감기었다.어머니의 한탄이 어렴풋이 들렸다.이대로 며칠을 다 잊고 잠을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선옥아,네 몸은 성한 거지? 별 일은 없었던 거지,응? 선옥은 잠이 들었다. 선옥 어머니는 선옥이 잠이 든 것을 보고 거실로 나왔다. 어느새 집안은 무거운 침뭄과 함께 한숨만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게 허황되게만 느껴진 선옥 어머니는 기운 없이 소파에 쓰러졌고,선우는 선옥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은 둣 넋을 잃은 채 아무 말 없이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옥 아버지는 안방에서 담배만 피워 대며 한숨만 내쉬었다.선옥 아버지는 이런 일을 전혀 예측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그 일이 막상 눈앞에 닥쳐오고 보니 절망적이고,허무하기 짝이 없었다.선옥의 모습을 생각할수록 이루 말할 수 없는 울분이 복받치고,한없이 괴롭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 되어 버렸고,가장으로서 낙심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먼저 이겨내고 참아야 한다면서 마음을 가다듬기로 하였다.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언젠가는 한 번 선옥이 겪어야 할 일이었고,차라리 이렇게라도 해서 영민과의 관계가 마무리된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다는 생각에 자신을 위안하기로 하였다.그리고,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선옥이 하루라도 빨리 저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 본래의 생활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다음 날 저녁이 다 되어도 선옥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식구들은 한 번씩 방에 들어가 보고는,혹시 선옥이 어떤 불안과 두려움에 이상한 행동이나 잠꼬대를 하지나 않을까 하여 걱정을 하였지만 별다른 기미는 나타나지 않아 마음이 놓이었다. 또 하루 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었다. 선옥의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선옥 어머니는 바로 방에 들어갔다. 선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운 채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선옥 어머니는 조심스레 다가가 선옥에게 말을 건넸다. 선옥아,좀 어떠니? 선옥은 그대로 눈만 뜨고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선옥 어머니가 다시 말을 건넸다. 선옥아,괜찮아? 응? 선옥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엄마. 말해 봐. 나,영민 오빠 있는 곳을 말하고 말았어. 야,이것아.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어서 정신 좀 차리고 뭐라도 먹어야지. 엄마,영민 오빠 잡히면 어떡하지? 그건 다 제 운명이야.네 몸 걱정해야 될 애가... . 그 사람들이 오빠를 찾아낼 수 있을까? 넌 영민이가 어디 있는지도 확실히 모르고 있잖아.네가 말을 어떻게 했는데? 서해안 어느 항구 도시에서 야학을 한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어. 그렇다면,너는 그 사람들이 그 항구 도시를 샅샅이 다 뒤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 무튼 이젠 뒤지든 말든 제발 신경 쓰지 말자,응? 엄마,그럼,그 사람들 찾기 힘들겠지? 선옥 어머니는 선옥을 안심시키려고 그저 영민은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엄마,그 사람들은 정확하지도 않은 내 말을 듣고 왜 날 풀어 주었을까? 이상해.지 금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들은 무언가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선옥아,그만 일어나자,응? 다 잊어 버리고 기운 차려 봐. 난 그 때 몹시 지친 상태였어.그 때 내 판단으로는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들이 영민 오빠 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나도 풀려날 것이라고 믿었어.그런데 엄마,불안해.영 민 오빠가 잡히면 어떡해,응? 갑자기 선옥은 울먹였다.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선옥 어머니는 당황한 기색이었다.선옥을 붙들고 정신을 차리라고 몇 번 소리 쳤다. 엄마,그 사람들은 내 옷까지 벗기면서 협박했어.끝까지 그 사람들 앞에 악착같이 버티려고 했었는데,잠도 못 자게 해서 정신이 몽롱해지고,나중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 말을 한 거야.그러니까 그 후로는 내 자신이 잠을 자고 있는 건지,눈을 뜨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서는 거였어. 선옥아,그만 얘기하고 잊으라니까,응? 아무 일 없었다고 생각해.그렇게 마음을 고쳐 먹으 란 말야,선옥아. 선옥 어머니는 몸을 부르르 떨며 선옥의 눈물을 닦아 주고 선옥을 품에 꼭 안았다. 여리디 여린 딸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착잡하기만 하였다.또한 선옥의 충격은 영민의 수배와 함께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되지나 않을까 하여 앞이 캄캄하였다.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신적인 문제로 또 병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만 섬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선옥은 며칠이고 방 안에서만 지냈다. 전화 벨이 울리면 미친 사람처럼 귀를 기울이면서 영민으로부터 전화만 오기를 기다렸다. 한시라도 빨리 영민에게 자신의 겪은 이야기를 하고 어디로든 그 곳을 피하라고 전하고 싶었다.그러나 선옥 혼자 애만 태우고 있을 뿐,영민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선옥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 번 송금한 봉투의 주소를 가지고 찾아나서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포기하고 말았다.아직까지도 그 사나이들이 자기 집 주위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막상 그 주소만 가지고 찾아간다는 것도 뜻대로 쉬운 일은 아니리라 생각되었다.그 주소에 대한 신빙성이 없을 뿐더러 헛걸음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선옥은 영민이 전화한 대로 야학을 하고 다른 돈 벌이를 한다는 그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분명히 영민은 이런 일을 예상하고 나름대로 어떤 대책을 세우고 행동을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선우는 어쩌다 선옥이 보고 싶으면 선옥의 방을 들어가 보았지만 아무 말도 붙이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나오곤 하였다.선옥 어머니는 끼니 때마다 식사는 걸르지 말라며 억지로라도 몇 술 밥을 뜨라고 종용하였다.내내 선옥 어머니의 한숨은 좀처럼 시들지 않았고,선옥 아버지 역시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선옥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던 중에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곧 선옥과 관계 있는 일로서 어느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그는 그 전화의 내용을 선옥에게 말을 못 하고 며칠을 지났다.선옥이 안정을 찾으면 한 번은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었다.그래서 시간이 나면 선옥의 방에 들러 보기도 했지만,선옥은 그 때마다 침대에 누워 창 밖 하늘만 무심히 내다보고 있었다. 다시 며칠 후,선우는 대학 입시를 치르고 무난히 합격하였다.선우의 입시로 다소 긴장이 되었던 집안의 분위기도 풀리고,그래서 선옥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외식을 하자고 제의하였다.그는 그 구실로 선옥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분 전환도 시켜야겠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선옥은 극구 나가지 않겠다고 했지만,식구들의 기분에 자신만 언제까지 그렇게 방안에서만 쳐박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리를 일어서 식구들을 따라 나섰다. 정말 오랜만의 외출을 하게 된 것이었다. 선옥은 그 사이 세상이 조금은 변할 것도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밖에 나와 본 세상은 무엇 하나 꼼짝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옆을 스쳐 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변함이 없이,치욕의 몇 날을 보냈던 그 전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자신 하나만이 잠시 이 세상을 떠나 그 이름 모르는 어디에 다녀온 것이었다.선옥은 그 동안의 불안과 두려움도 그 이름 모르는 어디의 것일 뿐이지,자신의 앞에서는 이미 사라진 꿈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그러니까 자신이 경험한 것은 사랑하는 영민을 위한 하나의 실험이었고,설령 치욕이었다 해도 단순한 하나의 통과 의식이었던 것이다.그것은 처음부터 영민이 모든 일을 알고 준비한,바로 그것에 대한 확인일 따름이었다.당연히 영민은 안전하게 지낼 것이고,가까운 시일 내에 모든 일은 잘 풀릴 것이라는 확신이 선옥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선옥의 얼굴에 살짝 웃음이 돌았다.무엇보다 식구들이 좋아하였다.선옥 어머니는 그 동안 선옥으로 하여 마음 조인 이야기를 해 가며 선옥에게 잘 견뎌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하였다.선우도 농담을 하면서 예전처럼 밝게 선옥을 대하려고 하였다. 선옥은 식사를 하면서 여러 번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일로 해서 집 안이 침울하거나 식구들간에 서로 불편해 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자신에게는 더 없는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선옥 아버지는 선옥에게 마음에 두고 작정했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선옥아,시간이 지날 만큼 지났으니까 말하마.엄마한테 말을 들어 알고 있지만,영민이 때문 에 고민하고 불안해 했던 모양인데,네가 네 입으로 그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해서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그것은 불가항력이야.누구든 그런 일을 닥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그 걸 가지고 죄책감을 갖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난 생각한다. 선옥은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네가 일러 준 곳이 확실한 것도 아니라면서? 물론 네가 영민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 고 있었던 게 없었대니까 일러 줄 수도 없었겠지만.어쨌든 영민이 문제는 너에 따라 결정되 는 사항이 아니다.네가 만약 말을 안 했다 치자,그렇다 해서 영민의 수배가 풀리는 것은 아 니잖니? 선옥아,자 힘내자.이 번 일로 너도 느낀 게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선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너한테 이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만,얼마 전에 사무실로 이상한 전화가 왔었 다.내 신분도 미리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근무하는지도 알았겠지.아마 너 를 조사한 사람들 같더라.그 사람들이 선옥이 네 얘기를 했다.어찌나 불쾌했는지 그 날 퇴 근 때까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누구에게도 말도 못하고 답답하더구나.내가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들이 더 그랬겠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라는 거였다.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주의 깊게 관찰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땐 화가 치밀어 참느라 혼났다.이게 우 리의 현실이다.그러면서 전화를 끊을 때 뭐라 했는지 알겠니? 윗사람한테 그 사실을 통보하 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라 하더라. 선옥은 아버지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식구들은 그 사람들의 공작이 세세하게 작용하여 자신들의 보금자리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것에 섬뜩하기까지 하였다. 선옥은 자신의 일로 아버지가 그런 수모를 겪는 것이 매우 가슴 아팠다. 그녀는 갑자기 그 사나이들의 그 질린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치가 떨릴 일이었다.그녀는 의식적으로 어금니를 꼭 물었다. 선옥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수모는 아직 자신과의 싸움이 남아 있다는 의미였다.앞으로 수많은 밤을 또 자신과 싸워야 할 일이었다. 선옥 아버지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선옥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선옥아,다 정리해,이 기회에.버릴 건 다 버리고.다시 새롭게 네 생활 시작해 보는 거야.알 겠니? 영민이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고. 그러자 선옥 아버지가 말을 끊었다. 여보,왜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해? 영민이 문제는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선옥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단지 어머니는 조급한 생각에 영민과의 문제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었고,아버지는 당연히 모든 문제를 슬기롭게 정리할 것이라고 자신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선옥은 이 자리에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지금까지 선옥이 영민에 대하여 어머니에게 말한 대로 여기서 말을 꺼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선옥 어머니는 좀 안정이 된 선옥에게 결혼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선옥 아버지의 말에 그만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아빠,엄마,이제 누나도 다 알아서 할 나이잖아요.직장이든,결혼이든 누나가 알아서 하도록 보기만 하세요.현재로선 그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아요. 선우의 중재로 약간 서먹한 분위기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여보,우리 나온 김에 백화점에 가서 선옥이 옷이나 한 벌 사 주는 게 어떻겠어? 선옥 아버지의 말에 선옥은 싫다고 하였지만, 그러자.너 학교 발령 받으면 당장 옷부터 하나 있어야겠다.가자. 선옥 어머니가 먼저 일어섰다. 제가 나중에 가 살게요. 누나,가.그래야 나도 옷 하나 얻어 입지,누나 덕분에.나도 대학생이 되는데. 이렇게 해서 선옥의 식구들은 백화점까지 나들이를 하였다.서로들 즐거워했고 선옥도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선옥은 겨울 바람이 매우 차갑게 느껴졌지만 세상 사람들과 몸을 스치면서 거리를 걷는 게 기분이 좋았다.과거에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꺼림칙한 비늘들이 술술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홀가분함을 의식했다.암흑과 같았던 지하의 한 구석에서 몸부림을 치던 시간의 조각들이 여지없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선옥은 그래야 했다.패배하여 이대로 주저앉는 것은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고,또한 영민도 포기하는 것이었다. 선옥은 문득 하늘이 보고 싶었다. 하늘은 거기 있었다. 얼마 지나서 선옥은 순위고사 합격 통보를 받았다. 통보 전화를 받으면서도 선옥은 합격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은 영민의 소식이었다.그런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선옥은 더욱 잠이 오지 않았다.밤과 자신과의 싸움.제 몸 하나 간수를 못 하는 자신이 밉기만 하였다. 아무리 아버지의 수모가 있어도 그녀에게는 지금 영민이 과연 무사할 것인가 라는 것이었다.만일 그 사람들에 의해 붙잡혔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방에 쳐박혀 있으면 더욱 가슴이 막히고 금방 숨이라도 끊어질 듯하였다. 그럴 때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 나갔다.어두워도 하늘을 보아야 가슴이 트여질 것 같았다.현관 문을 열고 마당에 섰다.먼저 크게 숨을 내쉬었다.밤 찬 공기가 매서웠다.어디든지 걷고 싶었다. 그런 어느 날 늦은 밤,막 대문을 열고 나설 때였다. 누군가 길 건너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얼굴을 돌리고 휙 모서리를 돌아가는 남자를 보았다. 누굴까.무엇에 들킨 짐승처럼 꽁무니를 감추고 달아나는 한 남자. 선옥은 순간적으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무엇인가에 쫓기듯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그랬다.그 사나이들 중의 하나.그녀가 똑똑히 기억하는 자였다. 그녀의 속옷을 찢으며 간악한 웃음으로 심문하던 그 사나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교차되었다. 선옥은 이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왜 온 것일까.지금까지도 계속 자기를 미행하고 지키고 있었던 것일까.그렇다면 영민은 아직 붙잡히지 않았고 무사하다는 말인가.그 사나이가 아직 나타났다는 것은 그렇다는 증거다. 선옥은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영민에게 전화나,아니면 직접 찾아가서 영민을 만날 수도 있다는 판단으로 감시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자신의 판단은 그럴 듯하였다.선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영민이 무사한 것은 눈으로 확인된 셈이다.선옥은 그 치욕의 긴 시간이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완전히 싹 가시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한편,선옥은 아직까지도 자기 집 주위를 그 사람들이 맴돌고 있다는 것이 불쾌하였다. 그러나,이내 그녀는 그것이 그 사람들의 할 일일 뿐이지,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다만,아직 그 사람들이 도청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영민으로부터 연락이 이대로 두절된 상태가 지속되기만을 바랐다. 선옥은 식구들에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리고는 책상 앞에 가 앉았다.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자꾸 자신을 붙들었다. 지금 무사하다고 해서 만족할 일은 아니었다.그 사람들은 며칠째 자신의 거동을 관찰하고 있었으며,동시에 영민이 있는 지역에도 사람을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수사망을 좁혀 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그것을 예감한 영민은 이미 야학을 하다가 몸을 피하기 위해 송금한 뒤에는 곧바로 그 지역을 떠났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그러고 보면,그 사람들이 영민을 추적하는 현 상태는 사실 수사 진척상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일이었다. 그 때,노크 소리와 함께 선우가 들어섰다. 선옥은 턱을 괴고 생각하다 고개를 들어 선우를 쳐다보았다. 누나,아직 안 자? 불이 켜 있는 것 같아서 들어와 봤어. 선옥은 탁상 시계를 보았다.열한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왜,잠이 안 오니? 응.누나,우리 라면 안 먹을래? 라면? 잠자기 전에 무슨 라면이니? 입이 심심해서.누나가 좀 끓여 줘라,응? 넌 손 없어? 엄마 주무시니까 누나가 끓여 줘.솜씨 한번 발휘해 봐.시집 가려면 연습이 필요하잖아. 이 애가 귀찮게 하네? 선옥은 선우가 지금 자신의 근심스런 보습을 보고는 말을 붙이고,위안하려고 한다는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래,알았어,이 녀석아. 선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우리 누나가 최고야. 선우는 선옥의 뒤를 따라나오며 선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안마하는 시늉을 하였다. 선우 너 아첨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지 않니? 누나,라면 먹고 커피까지 부탁해. 점점,이 애 봐.알았어. 난 누나가 타는 커피가 제일 맛있더라. 선우는 웃어 가면서 선옥 옆에서 말을 걸었다. 누나,오늘 우리 얘기하면서 밤 샐까? 어때? 뭐라고? 이 긴 겨울 밤 차 마시며 두 남녀가 인생을 얘기하는 것,멋지다는 생각 안 들어? 너와 인생을 얘기하자구? 왜,난 안 돼? 나도 엄연한 성인이야. 선옥은 선우가 눈치도 빠르다는 생각을 하였다.자기가 마음이 약해지고 낙심할까 봐 염려해 주고 신경을 써 준다는 것이 동생이긴 해도 더없이 고맙기만 하였다. 그 날 밤,선옥과 선우는 어린 시절 고향 이야기부터 지금의 주변 이야기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나는 일은 웃기도 하면서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옥으로서는 꽤 오랜만에 자유롭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 마냥 흐믓하였다. 이튿날,선옥 어머니는 선옥이 생활의 안정을 되찾았다는 판단에 그 간 못한 마음에 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선옥과 자리를 하려고 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선옥 어머니는 과일을 들고 선옥의 방으로 들어갔다. 선옥아,발령은 언제 나는 거니? 확실치 않아.빠르면 신학기에 나고,늦으면 다음 학기 때에도 날 수 있대. 그래? 서울인 건 분명하고? 응. 어디 불편한 데는 없니? 응. 선옥이 다른 때와 달리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선옥 어머니는 기회다 싶어 마음에 두었던 말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선옥아,자꾸 마음이 안 놓여서 하는 말이다만,매사 냉정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알겠 니? 아빠도,나도 너만큼 잠 못 이루고 고민했었어. 엄마,이렇게 안 해도 엄마 뜻 다 알아. 선옥은 차분히 말하였다. 선옥아,엄마가 볼 땐,영민이 문제가 앞으로 또 어떻게 해서 너에게 피해를 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네가 그 사람들에게 말한 걸로 봐서는 영민이에 대해 수사가 원점에서 별로 진전 된 게 없다는 얘긴데,만약 또 너에게 또 그 사람들이 접근해서 무엇이든 캐내려 한다면 일 은 어떻게 되겠니,응? 엄마,알고 있어.그만 해. 선옥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선옥아,네가 피해를 이 이상 더 보지 않으려면 어떤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할 게 아냐? 마음의 준비가 뭐야,엄마? 선옥은 상을 찌푸리며 어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얘가 왜 이래? 선옥 어머니는 멈칫하였다. 이 상태로 있으면 너 다시 언제 당할지 몰라.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이 그런 꼴을 당하는데 멍하니 보고만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니,응? 엄마,나도 다 알고 있어.그게 얼마나 무서운 지도 알고. 선옥아,아빠가 왜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그런 전화를 받아야 하니? 너 아빠 심정 이해할 수 있어? 엄마,나 한 가지만 엄마한테 말할게. 뭔데? 아빠같이 말 안 하고 지낼 순 없어? 엄마 뜻 다 안다고 했잖아.그리고,엄마가 무슨 말을 한다 해서 내 마음이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아.내가 스스로 경험하고 느끼면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엄마,난 어린애가 아냐.정도 이상으로 걱정하지 마. 선옥은 끝까지 침착하게 말하였다.그러면서 그녀는 마음 속으로 어머니니까 자식을 위해서 그럴 수 있으리라 이해하였다. 선옥 어머니는 선옥과 이야기를 하면서 선옥이 그 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선옥 어머니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고 싶었다.그래서 더 길게 선옥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기로 하였다.그것은 선옥이 이 번 일로 인해 겉으로 드러날 만큼 상당히 변해졌다는 것을 실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제 9 부 통행금지 선창의 겨울 바람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풍랑이 심해지면서 배들의 출어 횟수가 줄고 선창에는 정박되어 있는 배가 많았다. 영민이 배에서 내려 선주의 집에서 지난 지 보름이 되어 배가 입항하고,날씨 때문에 다음 출어는 포기한 채 새해를 맞이하였다. 원래 겨울 어장은 신통치 않아 배들이 한가하게 선창에 매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그 뒤로도 방송에서 며칠째 해상의 폭풍주의보를 알리자,선주는 조업이 어렵겠다며 겨울 한두 달은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선원들에게 말하였다. 어느 날은 갑판장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는 영민에게 술 생각이 난다며 줄포집에 가자고 하였다. 줄포댁에 대한 자신의 사정을 모르는 갑판장에게 말은 못 하고 영민은 그냥 따라나섰다.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니까 거의 한 달을 줄포댁을 안 본 것이었다. 줄포댁 집하고도 발을 끊고 있었기 때문에 상희와 약속했던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 주지 못하고 지나 온 것이었다.영민은 내심 아이들에게 죄라도 진 것 같아서 늘 마음에 아쉬움이 남아 있었고,줄포댁이 야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민이 줄포집에 들어서자 안은 손님들로 발을 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다.으레 겨울이면 선원들은 갈 곳이라고 해야 술집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갑판장이 시키는 대로 술을 몇 잔 마시면서,영민은 이따금 줄포댁을 보았지만 여느 때처럼 장사가 잘 되면 술 기운에 기분을 내며 오늘도 변함 없이 즐거운 모습이었다. 영민은 그 모습을 보면서 지난 밤에 한 이야기를 떠올렸고,그는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에게서 끈질긴 목숨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아니,그것은 연민이라기보다 애착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영민은 그래도 한 번 자기를 보아 주려니 했지만,영민에게 있어 그녀는 그렇게 냉정히 보일 수가 없었다.그랬으니 몇 년을 이 바닥에서 몸 하나 지키고 꿋꿋이 아이들과 살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석이,뭐 고민 있나? 영민이 말이 없자 갑판장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뇨. 자네,근디 나 아까 한 고향 사람 만났는디 단속이 심혔디야.우리는 해상에서 경비정도 안 만났지만 그 배는 기관장이 마침 면허가 없어 갖고 속 좀 썩었다고 허던디. 그랬어요? 영민은 놀랐다. 근디 말여,이 단속이 한두 번으로 끝날 거 같지 않겄다는디. 예? 영민은 맥이 떨어졌다. 배 안 타고 있을 적에 어뗬어? 지루해서 혼났어요.할 일 없어서 더 힘이 들었습니다.매일 잡념만 생기더군요. 선주는 별 얘기 없던가? 선주 어른께서 잘 보살펴 주셔서 그 덕분에 그럭저럭 견뎌 온 것이죠. 근디 당분간은 어떡헐쳐? 앞으로 배를 타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선주 어른께 신세 지는 것도 그렇고.이젠 제가 여기를 떠나야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영민은 배를 타지 않고 선주 집에 지내면서 그 사이에 많은 것을 생각해 왔다. 자신의 무적 승선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고,또 선주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되어서 어디든 마땅한 자리를 찾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떠나다니? 어디로 갈라고? 작정헌 디는 있고? ...... . 생각 잘 혀야겄구만. 무슨 방법이 생기겠지요. 영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막연하기만 한 자신의 정처는 선창의 바람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가고 어디로 가야 할지 영민은 망설임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자네가 잘 알어서 허겄지만,하여튼 용기는 잃지 말어,이 사람아. 영민은 갑판장이 위안하는 말을 들으며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형님,정말 저 하나 피할 만한 곳이 없을까요? 한석이,겨울만 좀 견뎌 봐.배도 묶였응게 얼마는 시간이 있는 거 아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그 간 견딘 것도 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이 사람,왜 이리 약혀지는 거여? 친구를 찾아가든가 해야 되겠습니다. 친구? 아니면 공사 현장이라도 가야죠. 막노동헐라고? 하게 생기면 해야죠. 허기야 뱃일도 혔는디 그거 못 헐리라고.근디,거기보단 여기가 피신허기가 훨씬 좋을 턴 디.배만 타고 바다에 나가믄 그만인게 말여.딴 때는 확인도 않드만,갑자기 단속헌다고 난 리리야. 선원들한테도 그 동안 많은 폐를 끼쳤지요.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 누군 배 탈 때부터 잘 허나? 자네는 그려도 요령 안 피고 일혀서 선주도 좋아 붙들었던 거 아녀? 제가 무슨 일을 잘 한 게 있었나요? 그 정도믄 배 탄 지 사오 년 되는 거여. 예? 영민은 웃어 넘겼다.하지만 그 웃음 뒤에 숨은 허탈함이란 싸늘하기만 하였다. 지금껏 근심스런 모습을 하면 가장 먼저 자기의 마음을 다독거리며,힘내라고 했던 갑판장의 말이 오늘도 영민에게는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이렇게 포근하고 좋은 사람과 헤어지면 다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민을 잡아 두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아무 미련 없이 떠나야 되고,그러면 다시는 영영 만날 수 없게 되는데,이 무서운 이별을 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 지친 몸 하나밖에는 그 어느 것도 없는데,이 긴 여행을 하고 있는 나는 칼날을 세운 겨울 밤 속 깜깜한 선창의 한 구석에서 길을 잃은 채 그것도 발가벗긴 몸으로 떨고 있을 뿐이었다. 한석이,자네 갈 때 가드라도 겨울은 지나고 가는 게 낫겄어.공사장이 이 겨울에 일이나 있겄는가? 모르는 바 아니죠.저도 더 여기서 견딜 때까지 있고 싶은데,그게 갈수록 어려워지니까 마 음만 울적해집니다. 단속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겄어? 헐 때만 허는 거겄지,뭐. 형님,신경 쓰지 마세요.저 하나 어디든 있을 데 없겠어요? 저는 지금 속에 있는 말이라도 마음 놓고 할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압니다. 참,저기,어머니헌티는 무슨 연락 없었는가? 그 뒤로 어디고 연락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네 참말로 지독헐 정도구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려도 그렇지,이 사람아.인자 고향 다녀오믄 안 될까? 어머니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끝이 없지만,참아야죠. 그려. 참는 수밖에 당장 뭔 수가 있겄는가? 자,마저 남은 술 비우고 일어서드라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서 줄포집을 나왔다. 술에 취한 몸을 가누며 눈을 크게 떴다. 함박눈이 소리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같이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저 보이지 않는 하늘 끝에서 하얀 점들을 이 땅에 뿌리고,바람도 잔 선창을 눈으로만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기고 지나가는 길 가 술집에서만 불빛을 내리고,간헐적으로 구슬픈 항구의 노래가 두 사람의 그늘진 마음을 적시었다. 사랑도 덧없고,인생도 덧없는 노래 소리는 겨울 밤의 비정함과 함께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속에 싸늘하게 쌓아만 가고 있었다. 형님,슬픈 밤이죠? 이 사람,슬퍼지는겨? 아예 저 눈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싶습니다. 자네,많이 취혔는 거 같은디. 취하긴요.형님,모든 것 포기하고,이 길로 이대로 가서 자수할까요? 지금 뭔 소리여? 누구라도 지나가다 들으믄 어떡헐라고? 이 사람 많이 취혔구만.않든 소리 도 허는 거 본게. 영민은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판장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영민을 붙들고 조심스럽게 배에까지 올랐다. 한석이,딴 사람들 다 잘턴디,조용허고 들어가 자드라고이. 제가 누구 말씀인데 거역하겠습니까? 밤 내내 함박눈은 내렸다.그 긴 겨울 밤을 온통 눈으로 뒤덮고 있었다. 영민은 선옥이 보고 싶었다.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도 전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밉기만 하였다.틀림없이 선옥은 소식만 오기 기다리고 있을 텐데. 영민은 이상하게 선옥에 대해서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렇게 소식이 끊어지게 되면 선옥도 자기같이 멀리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영민은 마음 한쪽이 텅 빈 채 허무에 묻혀 절망하는 기분이었다.어떻게 생각하면 영민에게는 단 한 줄기 빛만큼이나 소중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선옥인데 여기서 절망한다면 그것은 희망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영민이 이토록 힘에 겨워도 참는 것은 오직 선옥에 대한 의지 때문인데,만약 선옥을 잃어 버린다면 그는 모든 꿈도 잃어 버리게 될 것이었다. 영민은 선옥을 그리다 잠이 들었다. 영민은 잠에서 깨어났다. 소변을 보고 싶었다.참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눈을 비비며 선실 밖으로 나갔다.배설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쾌감이었다. 영민은 정신을 가다듬었다.머리가 아파 왔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다. 영민은 정박해 있는 배 위로 눈이 수북이 쌓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어렸을 적 언젠가 한 번 빼고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손목에 시계는 차고 있었지만 차라리 시간을 모르는 게 더 나았다. 인적은 찾아볼 수 없는 깊은 밤,그 고요가 외롭게 다가왔다. 들어가 잠을 자야 한다는 것도 잊어 버리고 영민은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호주머니를 뒤졌다.담배는 없었다.포기해야 했다.허전하였다. 어느덧 영민의 옷에도 제법 눈이 쌓였다.영민은 배에서 내려 거리를 걷고 싶었다.바람 없이 내리는 눈이,쌓이는 눈이 마음을 포근하게 해 줄 것 같았다. 그래,걷자.뛰어도 보자.그래서 막힌 가슴을 열어 젖히고 저 눈 속에 흠뻑 젖어서 긴 호흡도 하고,새벽을 깨우는 기침도 하고,살아 있는 자신을 확인해 보자.그리고 내 생명을 끌어안고 새벽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러 보자. 영민은 배에서 내렸다. 누가 한 번도 발자국을 내지 않은 눈 길이 어린애 마음처럼 들뜨게 하였다. 영민은 걸었다. 한 발자국,한 발자국 디딜 때마다 등 뒤로 보이는 자신의 흔적들.영민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선창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섰다.한 사람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었다. 눈은 그칠 줄 몰랐다.이것은 폭설이었다. 이럴 바에는 세상 모든 것을 다 덮어 버리고 추하고,불의한 것들은 이대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말고 새벽과 함께 사라졌으면 하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 내리는 사이로 불을 훤히 켠 건물이 눈에 띄었다.사람들 몇이 그 건물로 들어서고,큰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교회였다. 영민은 불쑥 그 안으로 들어갔다. 시골에서 가끔 어머니를 따라 새벽 기도회를 갔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옷에 내린 눈도 털지 않은 채,그는 기도하고 싶은 충동에 두 손을 모았다.무엇이든 저 마음 속 깊이 들어 있는 말들을 모두 내뱉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에 들어간 뒤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의 의식에는 늘 기도가 자리하고 있었다.무언가 부족하고 바라는 것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였던 어린 시절처럼 영민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몸을 엎드려 간구하곤 하였던 것이다. 지금 자신은 어디에 서 있으며,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그리고 그 끝은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닥쳐 오는 것인가. 나약한 자신의,흔들리는 마음의 기둥을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수없이 되뇌었다.또한 사랑하는 어머니와 선옥에게도 마음의 평온이 항상 같이 하기를 기도하였고,끝으로 상희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도 기도하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영민은 눈을 떴다.옷과 머리에 내린 눈이 그대로 녹아 물이 되어 그가 앉은 옆에 뚝뚝 떨어지고 얼굴에서도 물이 흘렀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가는 사람들은 문 옆에 앉은 자신을 보고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나누었고,고개를 들어 보니 벌써 창 밖으로는 새벽이 와 있었다. 순간,영민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한 홀가분함을 느꼈다.전신이 가뿐해지고,용기가 새벽 기운처럼 일어섰다. 그는 교회에서 나왔다. 눈은 그쳐 있었다.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리다 멈추고,부지런한 사람들은 집 앞의 눈을 치우느라 분주하였다.한 번씩 차가 지날 땐 바퀴의 체인 굴리는 소리가 겨울 새벽을 요란하게 울렸다. 영민이 다시 배로 돌아와 선실에 들어섰을 때 선원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 있지 않았다. 겨울철에 출어를 그만 두고 배를 묶어 놓은 뒤로,선원들은 밤마다 거의 술로 날을 보내고 있었던지라 아침 늦잠은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영민은 자리에 누웠다. 눈만 감으면 깊게 편안한 잠이 들 것 같았다. 한석이,점심 먹어야지.이 사람,아침 먹을 때도 안 일어나더니.어이,한석이. 영민은 누군가 자신의 몸을 두드리며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기관장이었다. 이 사람 술을 얼마나 먹었길래,이래? 예,조금 했습니다. 영민은 일어나 앉았다. 밤 새 눈이 많이 왔었는데 모르고 잤어? 기관장은 영민이 새벽에 밖에 나갔다 온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영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선실을 나왔다.배를 돌아보며 영민은 선원들이 눈을 치웠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지만 그만 잊어 버리기로 하였다. 그는 힘껏 기지개를 폈다.상쾌하였다. 그 때,화장이 식사 준비를 하다가 영민을 발견하고 다가와 말하였다. 한석이,아까 말여,나 밥 헐라고 요 앞 가게 가서 뭣 좀 사 오는디,거 줄포댁 있지? 그 아 주머니가 급허게 한석이를 찾던디? 배에 있다고 헌게 나헌티 가자마자 자네 줄포집에 들르 라고 혔어. 영민은 몹시 궁금하였다. 그 때가 언제였어? 얼마 안 됐어.하두 피곤혀서 자는 거 같아 갖고 안 깼는디,한 이삼 십 분 됐는개벼. 다른 말은 안 하고? 응.배에 올려고도 혔는디 여자가 아침부터 배에 나타날 수 있겄어? 나를 보고는 마침 잘 됐다고 그러면서 얘기허드랑게. 영민은 무슨 일이든 긴요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에 배에서 내렸다. 한석이,점심 다 혔는디,안 먹고 가? 화장이 소리쳤지만,영민은 곧장 줄포집을 향해 뛰었다. 그는 뛰어가면서 혹시 상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 하였다. 줄포집 문을 열었다. 줄포댁은 방 앞 마루에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영민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저,한석이 말여. 절 찾으셨다면서요? 저기 말여. 줄포댁은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누가,한석이를 찾던디. 예? 저를요? 그게 누군데요? 영민은 다급해졌다. 글쎄,어떤 남자들 둘인디,여기 말씨가 아닌 걸로 봐서 지방 사람은 아닌 거 같고.사진을 보여 주면서 찾드랑게.내 직감으로는 이상허다 싶어 그냥 모른다 혔어.저,혹시... . 영민은 줄포댁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을 수는 없었다.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영민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줄포집을 나왔다.주위를 몇 번이고 두리번거리며 배에 다시 올랐다. 분명히 수사관들이 여기까지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그들은 또 다른 술집을 들러 자신을 찾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어디로든 여기를 떠나야 했다. 그는 갑판장을 밖으로 블러내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갑판장은 당장 갈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하냐며 걱정을 하였다.그러면서 서둘러 배에서 내려 일단 다른 곳에 가 있으라고 하였다.그리고 선주에게는 말을 잘 해 놓을 테니 신경을 쓰지 말라고 덧붙였다. 그러나,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렀다면 시내 여러 곳에서는 검문 검색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판장이 선실에 있는 영민의 가방을 가져다 주었다. 어이,이렇게 하면 어때? 우선 급헌게 줄포댁 그 집에 가 있다가 숨 좀 돌리고 갈 곳을 정 허지 그려.기왕 이리 된 거 당분간은 거기가 안전헐 거 같은디. 별수없는 일이었다. 갑판장 말대로 우선 줄포댁 집에 가 있는 게 순서였다.그런 다음 갈만한 곳을 찾아내서 곧 검문을 피해 이 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영민은 이대로 선창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한편,갑판장과는 어떻게 보면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영민은 갑자기 울컥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적어도 갑판장하고는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었다. 언제나 영민은 그 누구와 헤어질 땐 꼭 그랬었다.그것을 다시 한 번 경험하는 자신이 더 서글프기만 하였다. 조심혀. 갑판장은 영민의 손을 꼭 잡았다. 영민은 갑판장의 짧은 말 한 마디를 뒤로 하고,시내에 있는 줄포댁 집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몇 번이고 주위를 살폈다.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침착해야 한다고 수없이 자신에게 타이르곤 하였다. 그런데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이렇듯 빨리 수사관들이 이 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었는데.그렇다면 선옥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아니면,선옥을 통해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을 안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처음 선옥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했어도 이 곳 이름을 대지 않고,다른 곳 이름을 댔어야 했는데.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송금했던 그 봉투가 혹시 발신자 추적에 걸려든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이 곳을 떠나면 그것은 자연히 해결될 일이었다.어찌 생각하면 더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자기를 쫓는 수사관들을 여기에 있게 하면 그만큼 더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었다. 단,그는 어머니와 선옥에게 좋지 않은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였다. 줄포댁 집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까 꽤 오랜만에 아이들을 보는 것인데 빈 손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집안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놀다가 아이들은 영민을 보자 기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저씨,이 번에는 배를 오래 탔었나 봐? 상희가 영민에게 달려가 안겼다. 잘 있었니? 영민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었다. 엄마가 아저씨 다시 안 올 거라고 했는데. 상옥이 하는 말에 영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이젠 배 안 타? 상희가 궁금해 하였다. 응. 그럼,서울로 가는 거야? 응? 응. 아저씨,그러면 오빠랑 서울 구경 시켜 줄 수 있겠네? 상희가 자꾸 묻자 상옥이 끼어들었다. 상희야,자꾸 네가 그러면 아저씨 우리 집에 안 오셔. 상희는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아무래도 잊어 버린 모양이었다. 영민은 그게 안심이 되었다.상희가 고맙기까지 하였다. 상희야,요즘은 아프지 않았지? 아저씨 가고 한 번 또 그랬는데,약 먹고 금방 나았어. 그랬어? 상옥아,상희 데리고 병원에 가 본 적 있었니? 예.그런데,엄마가 큰 병원에 다시 한 번 가자고 했어요. 영민은 화제를 바꿨다. 상희야,우리 눈사람 마저 만들자,응? 오빠,우리 엄마하고 아빠 것 만들었으니까, 이제 아저씨 것도 만들자. 그럼,나는 아저씨 것 만들 테니까,상희 너는 내 것 만들어.그리고 아저씬 상희 것 만들고 요.우리 누가 예쁘게 빨리 만드나 시합해요. 영민은 아이들과 눈사람도 만들며 겨울 짧은 반나절을 보냈다.그러나 그건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그는 무엇이든 아이들과 함께 몸을 움직이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수사관들이 가까운 곳에 와 있다는 생각에 초조하고 불안해서 마음만 조급하였고,그래서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선창에서는 수사관들이 탐문하며 조사를 계속하고,자기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을 찾아내어 자기에 대해 무엇을 알아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여기서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도 낮보다는 밤이 더 나을 것 같아 그는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여러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상태에서 갈 곳이라면 다른 항구밖에는 적당한 곳이 없을 것 같았다.공사장을 찾아가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하였으나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또한 교사를 하고 있는 윤호에게 간다는 것도 피신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그는 줄포댁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즐포댁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시계만 쳐다보았다. 저녁이 되어 아이들은 그 전처럼 밥을 차려 먹고 난 뒤,상옥은 방학 숙제를 하고 상희는 종이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상희는 그림을 그리면서 여러 번 솜씨가 어떠냐고 영민에게 물었고,그 때마다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민은 마음의 안정이 되지 않고 갑갑해서 마루에 나와 걸터앉았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수록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게 괴로운 일이었다.겨울이라 일자리도 쉽지 않았고,그러면 벌이도 못할 것을 생각하니 앞이 막막하였다.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래야 어느 정도 지낼 수는 있지만 그것도 두어 달이면 다 없어질 것이었다.그는 배처럼 마음 놓고 숙식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게 그저 슬프기만 하였다. 밤 늦게 줄포댁이 들어왔다. 그녀는 마당에 들어서자 영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언제 왔대? 두어 시 넘어서요. 근디 어떻게 된 일여? 난 여길 아주 떠나 버린 줄 알았는디. 밖에서 들리는 말 소리에 아이들이 나와 줄포댁을 맞이하자, 어서 들어가 자.엄만 아저씨허고 헐 얘기가 있응게,응? 줄포댁은 아이들을 제 방으로 들여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대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는 안방으로 영민을 들어오라고 하였다.영민은 줄포댁을 따라 들어가면서 그 뒤로 혹시 선창에서 자기와 관계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하였다. 한석씨헌티 어떤 사정이 있다는 건 애시당초 전혀 생각 안 헌 건 아녔는디,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던개벼? 그건 제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드릴 테니까,제가 나온 후에 어떻게 됐는지 아는 거 있으 면 어서 말 좀 해 주세요,예? 뱃사람들 몇이 우리 집에 와 술 먹으믄서 허는 얘기가,술집마다 그 사람들이 한석씨를 찾 아 다니드라고 허는 말을 들었고,저녁에는 누가 그러는디 그 사람들이 칠성호에 올라 가는 걸 봤다고 그러기도 혔어. 칠성호에요? 응. 영민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려? 지금 여기를 떠나야겠어요. 이 밤에? 통행금지 시간이 다 돼 가는디? 그러나 영민은 어쩔 수 없었다.통행금지 시간이 그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주머니,혹시 우리 배 갑판장 형님 거기 안 왔었어요? 아니. 그 사람들이 칠성호를 알아내고 했다면 갑판장이나 우리 배 선원들에게 나에 대해서 확인 했을 것이고 선주 집에도 갔을 것도 분명한데,아주머니,저 때문에 그 분들이 다치면 어떻게 하죠? 나중에는 틀림없이 승선자 명부도 대조하고 할 텐데 말이에요. 난 대체 무슨 얘기허는지 모르겄네. 실은,승선자 명부에 울리지도 않고 그 동안 배를 탔거든요. 그런 사람들 이 바닥에 한둘이 아닌디? 영민은 자리에 앉을 줄 몰랐다. 이 시간엔 갈 수 없응게 앉어. 아주머니,어디 저 하나 피해 있을 데 없을까요? 앉어 얘기혀.자세한 내막은 모르겄지만 내가 본게는 쫓기는 거 같은디 그렇게 성급혀 갖고 되겄어? 영민은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줄포댁이 담배를 권하였다. 영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한숨과 같이. 잠시 후,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영민은 줄포댁에게 도피하게 된 과정을 대략 이야기하였다. 줄포댁은 고개만 끄덕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만 하였다. 가끔 건넌방에서는 상희의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고,방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였다. 줄포댁이 이야기만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그 사람들이 여기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는 얘긴디,상황이 이렇게 됐으믄 아마 내일 부텀은 역에랑,버스 정류장에랑 경찰들이 깔리고 검문헐지도 모르는 거 아녀? 그렸으믄 아 까 곧장 여기를 떠나지 그렸어,안 그려? 어쩌면 검문은 벌써부터 하고 있었을 거에요. 응,그러고 본게 그렇겄구만.근디 인자 어떡헐 참여? 아주머니,어디 잠깐만이라도 피해 있을 곳이 없을까요? 내가 뭘 알어야지. 어떻든 여긴 날이 새는 대로 떠나야 할 텐데요. 저기,그 전에 한 번 우리 상옥이 아빠 병 고칠라고 기도원엘 간 적이 있었는디,내가 한 번 얘기헌 적 있었지.거긴 어쩔랑가? 기도원에요? 말이 기도원이지,안 믿는 사람도 많고 허던디.무슨 병이 있는 사람도 많았지만,그려도 한쪽에는 몸을 쉬러 오는 사람도 있었던 거 같았어. 그런 기도원도 있나 보죠? 영민은 귀가 솔깃하였다. 그냥 기도하러 왔다고 허고 거기서 얼마간만 지내면 될 거 아녀.산 속에 있응게 피신허기 도 괜찮을 거 같은디.돈만 조금 있으믄 얼마는 견딜 턴디,어떻겄어? 내 생각은 그게 기중 나은 거 같네. 그것도 방법이긴 한대요. 내가 가 봤던 디를 알려 줄게. 영민은 줄포댁을 만나러 온 게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줄포댁은 차편을 이야기하며 그 쪽의 내막을 상세히 알려 주었다.그리고는, 만약에 검문으로 여길 빠져 나가기 힘들면 나허고 차를 타고 가믄 될 거 아니겄어? 내외같 이 행세허믄 누가 이상허게 보진 않겄지.그러믄 안 돼? 하며 적극적으로 영민을 도와 주려고 하였다. 그는 줄포댁이 더없이 고마웠다. 마침 애들이 방학이고 헌게,내일 날 새는 대로 가는 게 어뗘? 영민은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아무래도 여기서 빠져 나가기에는 줄포댁의 말대로 하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았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줄포댁이 동행해 준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습니다.내일 일찍 떠나도 아주머니 괜찮겠어요? 갔다 오는데 시간이 걸리면 장사도 못 하고,아이들도 불편할 것이고요. 장사야 몸이 아파서 쉴 때도 있응게,그런 셈 치고.애들은 밥만 해 놓고 가믄 된게 마음 쓸 거 없어.그러믄 날 새믄 가는 걸로 허고 눈 좀 붙여. 영민은 다소 마음이 가라앉았다.처음 얼마는 낯설어 적응하기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책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영민은 아이들 방으로 가 상옥이 옆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자기의 일로 선주와 여러 선원들이 고역을 치르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여 더욱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선옥을 떠올렸다. 이 곳에 수사관들이 나타난 것은 반드시 선옥과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그래서 그녀한테 어떤 불미스런 일이 일어났을 것만 같아서 그는 더 마음이 무겁기만 하였다. 이렇듯 자신은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가 한결 차겁게 느껴졌다. 영민은 몇 번을 엎치락뒤치락하며 깊은 겨울 밤을 보냈다. 제 10 부 불면 창으로 들어오는 볕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밖은 아직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동안 선옥은 외출을 안 하는 게 도리어 익숙해져 한 때는 소파로,침대로 다시 책상으로 옮겨다니며 책만 읽으면서 지내곤 하였다.그러다 어느 때부터인가는 외출도 하고,더러 친구도 만나면서 서서히 자기의 생활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영민으로부터는 소식이 없어도 무사하려니 생각하고,밖에서는 누가 감시를 하고,관찰을 하든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또한 영민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것이야 말할 수 없지만,그 문제로 고민하고 근심한다고 해서 영민에게 더 나아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선옥이 믿는 것은 오직,영민이 지금까지 워낙 빈틈없게 행동해 왔기 때문에 그 뒤로 새로운 은둔처를 찾아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선옥이 그처럼 영민에 대해서 믿음을 갖다 보니까 어느 새 자신의 생활이 생각보다 빨리 제자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제 오후였다. 선옥이 외출에서 막 돌아오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선옥이 같은데,맞지? 선옥은 순간 귀에 익은 목소리라고 느꼈다.정 순경이었다. 예? 아... . 그녀는 이 통화가 도청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춤하였다. 그러나 정 순경도 그것을 눈치 챈 듯 선옥의 말을 끊고 이내 말을 이었다. 야,잘 있었냐? 친구라면 소식도 전하고 해야지.너 마음에 안 든다? 선옥의 느낌으로도 정 순경 역시 도청을 의식하여 친구같이 말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도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대하기로 하였다. 웬일이야? 우연히 생각 나서 해 본 거야. 어딘데? 응,학교에 볼 일이 있어 서울에 왔다가 인제 가는 길이야.버스 타는 데야.별 일 없지? 나야,뭐,그렇지.참,순위고사 발표했는데 난 됐어. 잘 했구나.야,그런데 너 지난 번에 한 번 만난 뒤로 왜 전화 한 통화 없었냐? 미안해.좀 그런 일이 있어서.저기,부모님,건강은 어떠셔? 선옥은 정 순경이 자기가 말하는 부모가 영민 어머니로 알아 주기를 바랐다. 부모님? 응,두 분 다 괜찮으셔.신경 써 줘 고맙다야. 그래? 선옥은 안심이 되었다. 너 이제 선생님 되면 보기가 힘들겠구나.시간 나면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 너희 집에? 응. 글쎄. 너 꼭 와야 한다. 알았어. 그럼,끊을게.차 시간 다 됐어. 잘 가. 선옥은 정 순경과 통화를 끝내고,꼭 한 번 집에 오라는 그의 말이 예사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민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한참 안절부절못하다가 저녁에라도 밖에 나가 정 순경이 도착할 때쯤 해서 시골 지서로 전화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그러나 감시를 받는 처지라 정 순경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판단에 그만 포기해야 했다.어쩔 수 없이 시간을 내어 시골에 한 번 다녀오는 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그런데 그것도 지난 번같이 미행을 당할 수 있는 일이어서 그녀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제부터 계속 이래저래 궁리한 끝에,마침 구정이 얼마 남지 않은 데다가 그 날이 토요일이어서 식구들이 고향에 가게 되면 선우를 통하여 정 순경과 만날 수 있을 것이고,그렇게 되면 영민에 대한 일도 자세히 알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갖기로 하였다. 단,문제는 식구들이 구정에 고향을 가겠느냐는 것이었다.정부에서는 신정을 쇠라는 것이었고,공무원인 아버지도 신정을 설로 지내 오던 터였다.그러나,지난 신정에는 선옥이 일로 고향에 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 번은 식구들이 모두 고향에 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선옥이 식구들에게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면 영민의 문제로 괜히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선우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선우를 제 방으로 불렀다. 선우야,나 좀 도와 줘야겠어. 갑자기 웬일이야? 이 누나가 어려울 때,너 힘이 되어 준댔지? 무슨 일인데? 빨리 얘기해 봐. 영민 오빠 문젠데,네 도움이 필요해. 왜 그러는데 어서 말해. 어제 연락이 왔는데 시골에 한 번 가봐야 될 것 같아.그런데 나 혼자 가긴 어렵잖니? 그래 서 생각해 보니까 마침 구정이 이 번 토요일이더라. 우리 신정 때 시골에 안 갔었으니까 식 구들이 다 가면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서.네가 엄마 아빠한테 말을 꺼내 봐.너도 대학에 합격하고 했으니까 시골에 가자고 하면 두 분 모두 좋아하실 거야. 겨우 그거야? 실은 나도 시골에 가고 싶었는데.작은아버지하고 작은어머니,또 사촌들 보 고 싶었거든.그런데 영민이 형한테 뭐 안 좋은 일 있는 거야? 모르겠어.너도 보면 알 거야.정민구라고 영민 오빠 친군데 시골 지서에 근무하고 있어.그 오빠가 전화해서 알았어.지서에 있으니까 대충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알 수 있잖아.내가 붙들려 갔다 온 뒤로 영민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은 예감이 들어. 걱정하지 말고 있어.내가 지금 엄마 아빠 같이 계시니까 얘기를 꺼낼게.만약 뜻대로 일이 안 되면 내가 혼자 시골에 갔다가 그 영민이 형 친구 만나고 오면 될 거 아냐? 그것도 좋지만 내가 직접 가서 만나고 싶어. 하여튼 영민이 형 일이라면 꼼짝을 못 하니,누나,영민이 형이 그렇게도 좋아? 너 까불지 마.나 어제 오늘 신경 예민해 있어. 언제는 근심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했으면서. 너 조용 안 해? 선옥은 선우를 믿고 내보냈다. 그리고는 두 부모의 승낙이 떨어지기를 바라면서 선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만 기다렸다. 얼마 지나서 선우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누나,아빠가 나오라시는데. 야,잘 된 거야? 선옥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하여튼 나가 봐. 선옥 아버지가 식구들을 앞에 두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 오래간만에 고향에 갔다 오자.어때? 토요일이 구정이고 하니까 잘 된 거 같다.지난 신정 때는 집안에 좋지 않은 일로 성묘도 못 했는데,이 번에는 성묘도 하고,선옥이 대학 졸 업에다가 선우도 대학에 합격했으니까,가면 시골에 있는 너희 작은아버지,작은어머니 좋 아하실 거다.특히 작은아버지는 이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이 곳 저 곳 발령 나 객지 생 활할 때는 너희들한테 잘 해 주시지 않았니? 가서 고맙다는 인사도 해야지.그리고 시원한 바닷바람도 쐬고. 선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면서 그녀는 영민의 일이 자신의 전부를 좌우하며 구속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터득하고 있었다. 아빠,저도 정말 바닷바람 한 번 쐬고 싶었어요. 선옥의 말에 선옥 어머니가 제동을 걸었다. 선옥이 너 만약에 이 번에 시골 가서도 쓸데없이 영민이네 집에 가고 하면 안 된다.알았 지? 엄마 아빠 제발 속 상하게... . 그러자 선옥 아버지가 말을 잘랐다. 여보,선옥이 어린애 아냐.몇 번을 얘기해야 그 속이 시원하겠어,도대체? 엄마,아버지,기분 좋게 다녀와요,우리. 선우가 웃으며 넘겨 그 말은 더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영민의 일을 얼마큼이라도 알 수 있게 되어서 선옥은 마음이 놓이었다. 이제 그 날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구정이 토요일이라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사실 사람들은 정부에서 신정을 쇠라 해도 거의 구정을 설로 지내고 있었는데,공휴일이 아닌 관계로 객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때 맞춰 성묘를 한다거나 웃어른을 찾아가는 일들이 쉽지가 않았다.그래서 그런 일은 신정에 하게 되었는데 특히 지방 사람들은 신정이 몸에 배지 않아 몹시 어색해 하였던 것이다.그런데 마침 올 구정은 토요일인 관계로 오후가 되면서 버스 정류장에는 고향을 다녀오려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였다. 그러나,선우가 서둘러 차표를 예매해 왔기 때문에 선옥의 식구들은 일찍 고향에 내려갈 수가 있었다. 선옥에게는 석 달 반 만에 가는 길이었다. 선옥의 시선에는 고향을 가는 즐거움을 아버지의 얼굴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그것을 아는 어머니도, 얘들아,아빠는 고향 가는 게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이랜다.너희도 그러니? 그럼요.사람이 고향을 잃어 버리면 그건 이미 사람이 될 자격이 없는 거라고 봐요.짐승도 죽으면 머리를 제 고향에 둔다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 고향을 잃어 버리고 산다면 그건 불 행일 거에요. 선우도 고향에 간다는 것에 대해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선옥도 거들었다. 영민 오빠네 말이에요.그 집안은 원래 고향이 북쪽이잖아요.그 어머님은 몇 해 전부터 언 제나 바다가 보이는 뒷산에 울라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사신대요. 얘는 꼭 영민이 결부 안 시키면 할 얘기가 없는 건지. 엄마,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우리는 그렇지 않으니까 모르지만,김 목사님이랑 얼마나 외 롭고 힘이 들겠어요? 이건 우리 민족 전부의 일이에요. 선옥이 말이 옳아.빨리 통일이 되어야지.다시는 전쟁이 이 땅에 있어선 안 되고. 선옥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선옥은 여러 해 전에 영민으로부터 들었던 그 집안의 내력을 떠 올렸다.늘 영민의 가슴에 한처럼 남았던 그의 아버지 이야기와 이 땅이 싫어 고향도,어머니도 두고 떠난 그의 형 이야기.끝내는 혼자 남아 집과 남편의 무덤을 지키고 고향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 가는 그의 어머니 모습. 차는 바다가 나타나 보이면서 고향 땅에 이르렀다. 역시 고향은 편안하고,여유가 있어 좋은 곳이었다. 선옥 아버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심호흡을 하며 활짝 웃었다.선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만큼 앞장을 서 갔다. 모두들 들뜬 기분이었다.귀한 그 무언가를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은 듯한 모습들이었다.시골의 모습도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거리를 수 놓았고 활기 있어 보였다. 선옥은 길을 걷다가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았다. 그것은 얼마 전부터 생긴 버릇이었다.자신의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뒤로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 보곤 했는데,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아야겠다면서도 외출을 하면 이상하게 그런 버릇이 나타나는 것이었다.그래서 자신도 너무 신경 과민이 아닌가 하여 주의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다. 선옥은 작은집으로 가면서 선우에게 먼저 당부를 해 놓았다.저녁에 시간이 나면 지서에 가서 정 순경을 만나,내일 교회 예배에 참석을 해 달라는 말을 전하라는 것이었다.선우는 선옥이 그러하는 것을,영민의 문제로 부모에게 내색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줄로만 알 뿐이었다. 선옥은 영민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다.그러나,지난 번 영민의 집을 출입한 일로 자신이 노출된 경험이 있었던지라,그녀는 하는 수 없이 내일 교회에서 정 순경을 만나고 영민 어머니도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구정이지만 시골에서는 설날이라 하여 세배도 하고 성묘도 하였다. 이튿날,선옥은 선우와 같이 교회에 갔다. 먼저 그녀는 예배를 보기 전에 김 목사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영민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지난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별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예배를 보는 동안,선옥은 교회 안을 둘러보곤 하였는데 영민 어머니와 정 순경은 보이지 않았다.정 순경은 선우가 확실하게 연락을 했다니까 안심이 되었지만 영민 어머니가 예배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아 여간 신경이 가는 게 아니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야 정 순경이 나타났다. 정 순경은 사정이 있어 시간이 늦었다고 하면서, 김 목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선옥과 함께 사택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 순경은 며칠 전 전화 이야기부터 하였다.그 때의 사정을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정 순경은 선옥에게 지난 번 고향에 왔다 간 후로 별일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선옥은 그와는 관계는 없는 일이지만,수사관들에게 붙들려 간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영민의 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냈다. 선옥씨 오늘 만나려고 어제 내가 영민이 어머님을 뵈었어.선옥씨가 영민 어머니 집에 간다 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서,건강이나 여쭙고 혹시 무슨 소식이 온 것이 있나 해서 였지.그런데,영민 어머님은 감기 몸살 기운이 있으시다며 누워 계셨어.교회는 웬만한 일로 는 절대 빠지시는 일이 없으시다고 목사님도 말씀하셨는데,오늘 교회에 안 나오신 걸로 봐 서 좀 심하신 것 같기도 하고... . 그럼 어떡하죠? 내가 다시 가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강단이 있으셔서 곧 일어나실 거야.거기,세 들어 사 는 가게 집 아주머니가 정성이 대단하신가 봐.영민 어머님이 그 아주머니 고맙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어. 그 아주머니 저도 한 번 보았지만,자주 들여다보고 보살피시던데요. 영민이 어머님 말씀으로는 마치 시어머니 모시듯 한다는 거야. 그런 분이 옆에 계시다는 게 천만다행이군요.영민 오빠 어머님께 저 왔다는 말씀 안 하셨 어요? 했지.그랬더니 선옥이가 영민이에 대한 무슨 소식을 가져 온 게 아니냐고 물어 보셨어.그 래서 내가 잘 알아 보고 다시 뵈러 온다고 했지. 집에 가면 말씀 좀 잘 드려 주세요. 응.그럴게.그리고,이젠 얼마 전에 있었던 얘기를 해야지.내가 하고 싶은 것이 그거였으니 까.저,그 사람들 있지? 어떻게 된 일인지 영민이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눈치였어.한 번 여 기를 왔다 갔는데,그러니까 신정 지나서 얼마 안 되어서 전화가 왔고,그 다음 날 영민이 집 에 다녀간 거지.나중에 영민이 어머니를 뵙고 나도 알았지만 영민이의 거처를 대충 알고 있 다는 거였어.아마,내 생각에는 그 사람들이 신정이고 하니까 혹시 영민이가 왔다 가지 않았 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왔던 거 같아.또,어디서 정보를 알아 냈는지 영민이 나타나지 않 자 영민 어머니한테,저 서해안 어느 항구 이름을 대면서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캐물었대. 영민 어머니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몸도 안 좋고 하시니까 별 소득도 없이 갔는데 그 후로는 연락이 없었다는 걸로 봐서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인 거 같아.그러니까,그 사람들 은 그 정보를 얻고 좀 막연하니까 일을 쉽게 풀어 보려고 여기에 와서 직접 영민 어머님을 만나 본 거야.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난 한동안 선옥이에게 무슨 안 좋은 일 이 일어난 줄 알고 있었지.내가 전화도 할 수 없었고, 마침 출장이 있어서 서울에 간 길에 전화를 한 거였어. 그러니까,정 순경이 선옥에게 전화를 한 것은 선옥에게 혹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해서였고,그 사람들이 영민이 있는 곳을 알았다는 것으로 보아 지금쯤이면 영민이 다른 곳에 피신하지 않았다면 잡혔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선옥에게 그 후로 어떤 연락도 없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하나 이상한 것은 그 사람들이 영민 어머니에게 장소 확인을 할 때 분명히 선옥으로부터 들었다고 했을 터인데,그럼 영민 어머니는 정 순경한테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만 빼고 했다는 것일까,선옥은 그것이 궁금하였다. 영민 어머니는 그 정보를 그 사람들이 조작한 것으로 알았을까.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선옥의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아니면 영민 어머니가 일부러 정 순경에게 그 이야기를 안 한 것일까.그렇다면,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신의 자식이 선옥으로 해서 잡히게 된 것을 나중에라도 알 게 될지도 몰라서였을까.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민구 오빠,고마워요.영민 오빠는 분명히 안전하게 피해 있을 거에요.난 그걸 믿어요.그리 고,곧 영민 오빠에게 좋은 날이 온다는 것도 믿고 있어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 참,이 번에는 영민 오빠 어머님을 만나 뵙지 못하고 가서 어떻게 하죠? 그건 내가 잘 말씀을 드릴게. 식구들에게 있어서 고향에서의 구정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고, 어른들을 찾아뵙고,성묘도 하였다.선옥 아버지는 수도 없이 고향에 온 것을 잘한 일이라고 말하였고 어머니는 포구에 나가 서울 집에 가져간다고 생선을 사 오기도 했다.선우 역시 어렸을 때 친구들을 만나느라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식구들은 막차로 돌아오면서 서울에 닿을 때까지 줄곧 고향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선옥 어머니는 궁금했던지 선옥에게 영민 어머니를 보고 왔느냐고 물었고 선옥은 그러지 않았다고 짧게만 답하였다.또 영민의 소식을 들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는 선옥 아버지가 말을 가로채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선옥 어머니는 고향을 간다고 한 시각부터 서울로 오는 차에 오를 때까지 선옥의 행동에 민감해 있었다.영민의 문제로 한 번 크게 충격을 받은 것 때문에,고향에서 영민에 대한 말을 하면 선옥이나 선옥 아버지가 싫어할까 봐 한 마디 겉으로 표현도 못 하고 애만 태웠던 것이다. 선옥 어머니는 서울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면서 나름대로 선옥이 이젠 영민으로부터 그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선우를 같이 교회에 보내서 선옥이가 영민 어머니를 혹시 만나는지까지를 확인하였고,선우가 전하는 말로는 별다른 조짐이 나타나지 않아 마음을 놓았으며,보기에도 선옥의 표정이 어둡지 않고,식구들이나 친척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온 식구들은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모두들 어서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일찍 잠을 자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선옥 어머니가 열쇠로 현관의 문을 열려는 순간,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반듯이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누군가 집에 들어와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여보,도둑이 들어왔나 봐요.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뭐? 선옥 아버지가 집안으로 들어서 불을 켰다. 선옥은 그녀의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옆에 서만 있었고,선우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방안을 돌아보았다. 안방이랑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선옥 아버지가 혼잣말을 하면서 선옥의 방을 열었다. 이리들 와 봐. 선옥 아버지의 말이 크게 들렸다. 식구들이 선옥의 방으로 왔다. 어머,이게 무슨 일이에요? 선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옥의 방은 책상과 장농의 서랍들이 모두 열려 있었고 옷과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었다. 선옥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 사람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머리를 스쳐 갔다.그것은 그 사람들이 영민의 거처를 알기 위해 무슨 단서가 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집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선옥은 어금니를 꼭 깨물고 눈물을 참으며,방을 치우기 시작하였다. 선옥 어머니는 흩어진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또 한숨을 내쉬었고,선옥 아버지는 어떤 말도 더 하지 않고 안방으로 갔다. 누나,이럴 수도 있는 거야? 선우도 누구의 소행인 줄 아는 듯이 분개하였다. 선옥아,너 이래도 더 참을 수 있겠니? 선옥 어머니는 무슨 말이든 다 내뱉고 싶었지만 참는 빛이 역력하였다. 선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 더 남았다면 더 겪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 속으로는 영민이 아직까지 그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위안을 가질 수 있었고,그것을 이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반갑다면 반가운 일이기도 하였다. 얼마 지나서 선옥 아버지는 선옥을 불렀다.마음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선옥아,놀랐지? 선옥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당하는구나.목숨만 뺏기지 않았을 뿐이지,이 만큼이면 철저하게 당하고 있는 거 야.그런데 뭐 없어진 거 있니? 영민이와 관계된 것들 말야. 특별히 둔 게 없어서 그 사람들이 가져간 것도 없을 거에요. 따지고 보면,그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냐? 다 명령대로 따라 할 따름인데.견뎌야 할 것은 견뎌야지 별수 없잖니.어린 나이에 험악한 것을 겪게 된 네가 이 애비는 가슴이 아프다.이 것을 영민이와 너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엔 이 세상이 너무 잔인하구나. 아빠,저를 용서하세요. 선옥은 다시 울음을 참아야 했다. 이 땅에 사는 사람 모두가 다 죄인이구나. 그만 주무세요. 알았다.어서 건너가 봐.오늘 밤은 몸이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죄송해요,아빠. 선옥은 자리에서 일어서 방을 나갔고,선옥 어머니가 들어왔다. 선옥 어머니는 다시 선옥의 결혼을 서두르자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선옥 아버지의 상심한 얼굴을 보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선옥 아버지는 선옥 어머니의 한숨을 다시 들으며 눈을 감고 잠을 청하였다. 하지만,오늘 밤은 이대로 잠을 이룰 것 같지는 않았다. 제 11 부 그리움 줄포댁에게 이렇게 신세를 질 줄은 몰랐다. 줄포댁이 몇 년 전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몇 달 지낸 적이 있는 기도원에서 영민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그것은 순전히 줄포댁 덕분이었다. 기도원은 차에서 내려 산 길을 돌아 이십 분 남짓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고 뒤쪽으로 큰 산들이 둘러서 있어 첫눈에 산수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줄포댁은 먼저 기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안면이 있는 사무장이라는 사람을 만나,자기의 이름으로 수속을 밟아 영민에게 독방 하나를 얻게 해 주었다.마침 겨울이어서 기도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어렵지 않게 마음에 드는 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 줄포댁은 사무장에게 영민을 사촌 동생으로 소개하였고,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왔다면서 각별한 부탁을 하였다. 사무장은 쉰이 넘은 나이에 매우 소탈하고 붙임성이 있어 보였는데 주위 사람들은 보통 집사님이라고 불렀다. 줄포댁은 영민의 방을 둘러보고 손수 걸레를 빨아 와 청소도 해 주었고,영민은 거절하였지만 빨랫감이 있으면 내놓으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리고,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영민에게 구정에 시간이 나면 한 번 찾아오겠다는 말을 하면서 얼마의 돈을 쥐어 주기도 하였다.영민은 자꾸 받을 수 없다고 뿌리쳤지만,기어코 그녀는 돈이 없으면 힘이 떨어진다면서 방에다 던지듯 두고 기도원을 떠났다. 영민은 기도원 입구 버스 정류소까지 배웅을 나가면서 그녀에게 몇 번 고맙다는 말을 하였고,신세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더하였다. 그는 기도원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일로 칠성호 선주와 선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혹시 자기 하나로 인해 어떤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떠나지 않아,그들에게 큰 죄만 짓고 도망쳐 나온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였다.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줄포댁이 나중에 온다면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어쩐지 불안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기도원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영민은 우선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였다.새벽에는 꼭 예배당에 나가 기도회에 참석하기로 하였고,주변 청소도 스스로 하며,적당한 운동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처음엔 고작 사무장과 대화를 갖는 게 일이었지만,그것도 사무장이 여러 일로 바쁜 관계로 옆 방에 기숙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빌러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이 되었다. 가끔 기도원에는 각 교회에서 단체로 수련회를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특히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찾아오곤 했는데 그 사람들은 거의가 안수 기도를 받기 위해서라고 하였다.영민은 원래 안수 기도 같은 것은 믿지 않았지만 주위에서 그런 것을 듣고 보고 하면서 내심 신비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실제로 영민은 요양하러 온 사람의 행동을 보여야 했기 때문에 행동에도 주의를 기울였지만,다른 병자들이나 그들의 보호자들과도 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영민은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의학이 발달해도 고칠 수 없는 희한한 병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새삼 비교적 건강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러다 영민은 언젠가부터 뒷산에 오르는 습관이 생겼다. 아침을 마치고 산 정상에까지 갔다 오면 한나절은 쉽게 보낼 수 있었다.정상에 올라 산 너머를 바라다보면 신작로가 보였고,들판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그리고,눈이 채 녹지 않은 산의 경치와 얼음이 언 틈으로 흐르는 골짜기의 시내 소리가 세상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여 영민은 무엇보다 마음이 가벼워서 좋았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서 영민은 선옥이 더욱 보고 싶었다. 배를 탈 때는 뱃일에 시달려 선옥에 대한 생각도 잊곤 했었는데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다 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선옥의 생각에 빠질 때가 많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산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몇 번 낯이 익게 되어 사귄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는 교인도 아니고,신상에 무슨 병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관심을 가지고 일부러 접근하여 말을 걸어 보니 그 역시 영민과 같이 시위 적극 가담으로 수배를 받고 있는 눈치였다. 그가 처음 말을 꺼낼 때,영민을 상당히 경계한 것은 사실이었지만,영민이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고 위안과 격려를 하자 그는 더욱 영민에게 호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혼자였던 그는 대화할 상대가 없었는지 자주 영민을 찾아오게 되었고,하루에 한 번은 영민을 찾는 게 그에게는 일과가 되다시피 하였다. 영민은 그를 만나면서 그가 불안해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몹시 후회하고 있는 빛이었다.그러나,영민은 그러한 그를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을 의식하였다.처지를 생각하면 서로 비슷해 이야기가 될 것 같았지만,영민은 자신을 보일 수 없었고,이 상태가 더 계속되면 서로에게 피해만 줄 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그리하여 영민은 자신이 먼저 그를 피하려 했으며 방에까지 찾아오면 그 때마다 핑계를 들어 그를 돌려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그는 밤 늦게 술에 취한 모습으로 영민을 찾아왔다. 기도원 안에서는 술이나 담배는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었는데 아마 관리인들 몰래 밖에 나가 마을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온 것 같았다. 형님,주무셔야 할 텐데 죄송합니다. 그는 영민의 이름을 모르고 다만 형님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그것은 영민이 한석이라는 이름을 다시 쓸 수 없어 그가 한 번 물었을 때 그냥 형님이라고만 부르라고 했던 것이었다. 이 사람 갑자기 웬 술야? 들어가도 되죠? 너무 늦었잖아.가 자야지.옆 방 사람들도 다 자는 시간인데. 영민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들어가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 큰일을 내려나? 기도원에서 술을 마시고 다니면 어떻게 해? 쫓겨나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군.관리인들 시간마다 순찰 도는 것 같던데. 그는 문을 닫고,영민의 곁에 바짝 앉았다. 형님,제 말씀 좀 들어 주십시오. 밝은 불 빛에 그를 보니 그는 술을 이길 수 없을 만큼 취해 있었다. 영민은 그가 술을 전혀 못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너무 취했어.이 곳 방들은 벽이 허술해서 밤에 작게 소리를 내도 옆 방에 다 들려. 영민은 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특히 자네는 행동이나 말을 주의할 사람이잖나? 예,알고 있습니다. 그도 따라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그러니까 할 말은 내일 하고.어서 가 자. 영민은 타이르듯 말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형님,저는 요즘 모든 게 두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끝내 그는 이야기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이럴 수도 없고,저럴 수도 없고,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형님 이 일러 주세요. 그는 술을 먹어야 본심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말문을 열었다. 영민은 빨리 듣고 내보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였다.괜히 실갱이를 벌이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네같이 그렇게 마음이 약한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나? 다 각오하고 했을 거 아냐? 형님,아닙니다.저는 그저 그 상황에 제 뜻이 옳다고 외친 것뿐이고,그것이 정의라고 믿었 기 때문에 학생들 앞에 떳떳이 나섰던 겁니다. 그는 보기보다 겁이 많았고 자신의 행동에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그럼,자진출두해서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고,선처를 봐 달라고 해야지.이렇게 술이나 마시 고 시간만 낭비하면 되겠나? 영민은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물론 그 말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을 해 놓고도 자신은 그 말을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신이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과 같은 입장에 있는 남을 통해 자신을 보고 느끼면서 영민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영민의 앞에 그의 탈을 쓰고 있을 따름이지,그의 실체는 영민이었다는 생각이 영민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영민은 마치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을 가졌다. 그러나 영민은 돌연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자신의 탈은 너무 초라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히죽이 웃고 있었고,그 웃음은 곧 비웃는 웃음으로 변하여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형님,지금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러지도 못하고 이렇게 날짜만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의식적으로 소리를 낮추었다. 형님,그런데 이 상황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걸로 보십니까? 낸들 알겠나. 제가 학교에서 떠날 땐 학교에 소문 나기를 군인들이 다시 정치를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 는데요.그건 그냥 소문일 뿐이겠죠? 어림도 없는 소리 아닙니까? 영민은 그의 말을 잘라야 했다.이 자리가 길어지면 자기에게 이로울 것이 하나 없을 것이었다. 그만 해,이젠.여기서 이렇게 술에 취해 이야기하는 거,자네한테 좋을 거 없어,이 사람아. 그만 하고 건너가 자.그리고 술이 깨면 한 번 잘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려.알겠어?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조용해졌다.영민은 그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술을 못이겨 하는 그를 영민은 일으켜 세웠다.그리고는 방 문을 열고 신발을 신겨 주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며 몸의 중심을 잡고 자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 취했어.조심해 가. 영민은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어찌 된 일인지 또 한 번 그의 뒤모습에는 자신의 희미한 그림자가 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영민은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리고,어렴풋한 밤 그늘 속에 보이는 산이 그만 괴물처럼 자신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방 문을 얼른 닫고 몸을 피하였다. 그 날 밤,너무 기운 없어 쓰러질 듯 겨우 몸 하나 지탱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던 그. 바로 그의 모습은 영민이 그를 본 마지막 모습이 되었고,그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 주위 사람들의 들리는 말에 의해서였다. 누구는 자수하여 경찰을 따라갔다는 말도 하였고,또 누구는 경찰이 수사하던 중 기도원에 있는 것을 알아 내고 연행해 갔다는 말도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영민은 얼마 동안 우울한 날을 보내다,잠시 기도원을 떠나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그런 일이 터지자 사람들의 입에서 기도원 같은 곳에는 죄를 짓고 피신하여 숨어 지내는 자가 많다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아무래도 종교 단체는 경찰의 수사 범위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보니까 절이나 기도원에는 그 전부터 수배자가 피해 있기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영민은 사무장에게 집안일로 며칠 다녀 오겠다고 간단히 말을 하고 오랜만에 윤호를 만나기 위해 기도원을 떠났다. 영민은 지금이면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학교가 있는 마을에 들어서면서 예나 다름없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아늑하고 포근하다고 느꼈다. 그러니까,그가 서울을 떠나 처음 여기를 들른 지 거의 열 달만이었다. 그가 학교에 도착한 것은,산단 벽지라 일찍 해가 서산을 넘어서는 저녁 무렵,윤호가 막 퇴근을 하려는 참이었다. 그는 마침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에게 교무실에 심부름을 보내어 윤호를 찾았다.윤호는 금방 나왔고,그는 영민을 보자 매우 반가워하였다. 아니,이게 누구야,영민이 아냐? 윤호는 겉으로 보기에도 학교 선생님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잘 있었지? 영민은 윤호의 손을 붙들었다.윤호의 손이 새삼 따뜻하다는 것을 느꼈다. 너,그 동안 연락도 없이,어떻게 지냈어? 나야 뭐 잘 지냈지. 잠깐 기다려.퇴근 시간이니까 들어가 가방을 가지고 나올게. 윤호는 다시 교무실로 들어갔다. 영민은 교사 한쪽 긴 의자에 앉았다. 영민의 눈앞으로 해가 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산은 그늘을 드리우고 일찌감치 휴식을 취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멀리 마을의 인가에서는 하얀 연기를 내며 그윽한 정취를 흘리고 있었다. 영민은 잠시 고향의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지금쯤이면 어머니는 혼자에 익숙한 자신의 저녁을 지으실 것이었다.그리고 한숨을 삭이면서 이 자식을 생각할 것이었다. 윤호는 바로 나왔다. 가지. 두 사람은 걷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그 때 집에서 하숙하고 있지? 나,지난 가을에 결혼했어. 결혼? 영민은 놀라는 기색이었다. 왜? 난 결혼하면 안 되냐? 잘 했다.하긴 객지에서 혼자 지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연애 결혼? 중매로 만났어. 두 사람은 한참 결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고 보니까,너 교직 시작한 지 일년 됐구나. 응,남보다 군대 기간도 짧았으니까 일찍 시작한 셈이지. 참,그 때 너 방위 간다고 할 때 못 먹는 술 먹고 고생했지? 석훈이하고 말야. 으응,이 학년 마치고였던가? 석훈이는 어떻게 지내? 한 학년 더 마쳐야 졸업이잖아.나 결혼할 때 보고,겨울 방학 때는 여기까지 왔었지.네 얘 기 많이 했는데.너 보고 싶다고 하더라.학교 생활은 시국이 그래서 어수선한가 봐.여기 있 으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바깥 세상은 그렇게 어수선한데 여기는 참 좋구나.조용하고 아주 세상 잊어 버리고 사는 딴 세상 같아. 그렇게 보여? 응. 그래.그게 어느 때는 훨씬 좋을 때가 있지.그런데 너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인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어. 윤호는 얼마 안 가 손으로 자기 집을 가리켰다. 저기,우리 집이야.아까 학교서 나올 때 집에 전화 연락 했어,친구 왔다고.식사 준비도 하 라고 하면서,며칠 있다 간다고 했으니까,다른 소리 하지 마,알았지? 응? 영민은 멈칫하였다.영민은 별안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오려고 처음 마음을 먹었을 때는 윤호가 혼자라는 생각에 며칠은 작정하고 찾아온 게 사실이었지만,윤호가 결혼한 처지인지라 단 하루도 지내기가 거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윤호의 집에 들어서서야 더욱 그 생각은 영민을 붙들었다.그는 방 한 칸을 얻어 세를 사는 윤호를 괜히 찾아왔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윤호의 아내는 영민이 보기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친근감을 주는 여자였다.가까운 친구의 아내는 늘 그런 느낌을 준다는 말을 누구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유달리 그녀는 더 그러하였다. 그녀가 저녁 상을 차려 왔다. 갑작스레 연락 받고 준비하라 해서 하긴 했는데,이거 어떡하죠? 흉보시면 안 돼요. 그녀의 웃음은 따스하였다. 뭐라 불러야 하나? 그냥 제수씨라고 부를게요.저,제수씨,이거 폐 끼쳐 죄송합니다. 윤호가 끼어들었다. 너한테는 형수님이 돼야지 어떻게 제수씨냐? 형수님? 그래. 영민은 윤호의 아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수씨,형수님이라고 부를까요? 제수씨 마음 내키는 대로 부를게요.말씀하세요. 윤호의 아내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하고 부엌에 가서 술을 들고 들어왔다. 술도 준비했어? 예.오랜만에 친구 분이 오셨는데 한 잔들 하셔야지 않겠어요? 영민은 윤호의 말이 없었는데도 술을 준비한 윤호의 아내가 다른 여자들하고는 무엇인가 다르다고 느꼈다. 그녀의 예의 바른 행동과 말투가 분명히 요즘에는 보기 힘든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수씨 내가 볼 때 윤호 너보다 생각하는 게 백 배는 나은 것 같다. 야,너 이거 왜 이러냐? 사실이 그렇잖아.저기,제수씨,신랑 맘에 드세요? 윤호의 아내는 웃기만 하였다. 잘 해 주냐고요? 그녀는 영민의 성화에 답변하였다. 결혼 전하고는 영 딴판이에요. 그러자 윤호가 웃으며 눈을 부릅뜨고 꾸짖듯 그의 아내에게 따졌다. 뭐? 내가 어땠는데,응? 말해 봐. 세 사람은 한바탕 소리 내어 웃었다. 영민의 기억으로는 꽤 긴 시간만의 즐거움이었다.그는 한 가정의 안락함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 것 같았다.그러나 그에게는 아직까지 그런 것은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영민은 윤호의 내외를 보면서,자신은 그 동안 무엇에 홀리어 먼 길을 헤매다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때로는 길을 잃고 방황도 하고,때로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이제는 제대로 길을 찾아 제자리로 돌아온 자신의 분신을 영민은 느끼고 있었다. 어느 새 창 밖은 어둠이 내렸다. 윤호의 아내는 주인 집 딸이 쓰는 방으로 잠자리를 옮겨야 했다. 영민은 미안한 마음에 몇 번을 그녀에게 내일은 꼭 가겠다고 말하였다.그러나,윤호는 영민에게 괜찮다며 며칠을 더 묵어도 된다고 하였다. 윤호는 밖에 나가서 술을 더 사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시간이 흐르며 서로 술에 취해 갔다. 어머니께선 어떻게 지내냐? 잘은 모르지만 별일이야 있으시겠니? 영민은 그 말을 해 놓고도 자기가 마치 남의 말이나 하듯 한다고 느꼈다. 야,임마,잘 모르겠다니.이렇게 해서 너 언제 효도하고,결혼하고 살 거냐? 그래,그 때가 언제 될지 난 모른다. 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내 걱정하지 마.야,우리 다른 얘기하자. 네가 여기 다녀가고 한 달쯤 뒤에 누가 왔었는지 알지? 응? 응.날 잡으러? 학교 친구라고 해야 너하고 석훈이뿐이니까.윤호야,미안하다,친구 잘못 둬서. 석훈이한테도 갔었대. 그 쪽에도 갔었겠지.윤호야,나는 왜 이렇게 남들에게 피해만 주고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 겠다. 그런데 너 참 용하다.도대체 어떻게 지낸 거냐? 나? 배 탔어. 배? 네가 무슨 배를 탔다는 거야? 고기잡이 배. 야,너 같은 애도 선원으로 시켜 줘? 고생 많이 했지.하지만 해 보니까 할만 하더라. 지금은? 저,깊은 골짜기 기도원에 있어. 기도원? 그 놈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있는 곳까지 냄새를 맡았어.배 타고 있다가 도망친 거 지. 두 사람은 서로 점점 더 술에 취해 가며 자기들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윤호의 아내가 방 문을 두드리고, 윤호씨,소리가 너무 커. 하는 말에 그제서야 두 사람은 조심하였다. 야,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냐? 네 집 식구 불편해서 말야.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도 그러냐? 참,혹시 임신한 거 아니냐? 영민아,네가 뭘 안다고. 맞지? 그래.삼 개 월째래. 다음에 만날 땐 애 아빠가 되어 있겠네? 아빠? 야,정말 너 부럽다,부러워.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서야 자기들이 얼마큼의 술을 마셨는지 알 수 있었다. 윤호의 아내는 북어국에 아침 상을 올렸다. 영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말을 또 하였다. 윤호야,너 나갈 때 같이 나갈게. 영민아,오늘 토요일이니까 일찍 끝나.좀 기다려.다음 토요일이 구정인데 정 불편하면 그 때까지만 있어. 아냐.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너 지금 가면 나 서운해서 며칠간 잠도 못 잘 거야. 알아,네 마음. 윤호의 아내가 숭늉을 들여 왔다. 더 계시다 가세요.저 때문에 신경을 쓰시는 것 같은데,어제 주인 집 딸아이한테 말을 했어 요.당분간만 같이 자야겠다고요.그랬더니 자기는 더 좋대요.저랑 얘기도 하고 하는 게 좋은 가 봐요. 제수씨,고마워요.제수씨 때문이라도 더 있고 싶지만,저는 가야 돼요.하루도 채 안되는 시 간이었지만 친구가 좋아서 온 거에요.여기를 향해 떠날 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생겨서,마 음의 위안을 받을까 했지요.제수씨는 잘 모르겠지만,전 지은 죄가 많아서요.여기를 떠나야 합니다.어제,오늘 이 두 끼의 식사를 난 못잊을 거에요. 영민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윤호야,너 제수씨한테 잘 해.애 아빠 되고 제수씬 애 엄마 되고 하면 다시 올게.그 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마음 놓고 만날 수 있을 거야.어떤 말도 다 터 놓고 할 때가 오겠 지.난 믿어.우리 그 땐 밤새 이야기하면서 큰 소리로 웃어 보자. 윤호 내외는 듣기만 하였다. 나야 여기 있으면 좋지.하지만 더 불편할 것 같아.윤호 너를 보니까,내가 힘이 더 나고 너 같이 나도 한 번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어머니도 모시고 말야.그러기 위해선 끝까지 용기 잃지 않을게. 영민은 윤호와 함께 집을 나섰다. 갈림길에 와서 윤호는 학교로 향하고 영민은 정류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서 윤호를 바라보았다.윤호도 영민을 돌아다보았다.그러다 서로 마주보고 한참을 서 있다가 영민이 먼저 되돌아서면 그도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 가던 길을 걸었다. 영민은 차를 기다리면서 석훈을 찾아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서울까지는 어려울 것 같았다.아마,서울까지 가게 되면 마음이 약해져 선옥과도 만나질 게 분명했기 때문에 미리부터 서울길은 포기하였다.별수없이 곧바로 기도원으로 가야 했다. 선옥이 보고 싶었다.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는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고 속으로 외쳤다.그러나 그 무엇인가에 눌려 이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선옥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가 왔다.차에 올랐다.열을 지어 선 대로,자신의 의지가 전혀 아닌 것처럼 차를 탔다.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이었다. 차가 움직였다. 어디로든 떠난다는 것이 싫었다.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죽음밖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벌써 영민은 윤호에게 약속한 그 용기가,자신도 모르게 차가 달리며 일으키는 먼지 속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멀리 산으로 새들이 떼지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슬펐다.구속은 역시 슬픈 것이었다.저 산으로 날아가는 새들이 자유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것들은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차를 갈아 탔다. 차가 갈수록 길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과는 정 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낯선 길인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살폈다.누구도 하나 길을 알려 주지 않았다.순간,그는 숨이 차 오르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것은 언제,어떻게 불시에 검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언젠가 까마득한 저 앞에 흰 점이 하나만 보이는 긴 터널을 단 일 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그 두려움이 전신을 꽁꽁 묶고 있는 것이었다. 울고 싶었다.울면 마음이라도 탁 풀어질 수 있는데.울음마저도 영민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긴 터널을 지나온 것처럼 차에서 내렸다. 기도원으로 난 길을 걸어 얼마를 갔다.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길 아래로 전에 보지 못하였던 시내를 발견하고 그리로 내려갔다. 시내 줄기는 물이 적었지만 끊임없이 물 줄기를 내려 보내고 있었다.유난히 물 소리가 정답게 들렸다.세수를 하였다.차가웠다.더 차가웠으면 하였다.개운하였다. 하늘을 쳐다보았다.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러나 뭐라 소리를 지를까. 야 - 재촉하여 다시 걸었다. 기도원이 앞에 다가섰다. 그 곳은 내 집이었다.영민은 비로소 기도원에 다시 돌아와서야 모든 게 안심이 된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다시 기도원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달력을 보았다. 줄포댁이 시간 나면 찾아온다는 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그러나 기다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무장이 어쩌다 한 번씩 왔다. 그는 늘 바빴다.그는 생활에 불편한 것은 없는지,그리고 방은 따뜻한지 물었다.영민은 신경을 써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였다. 낮이 많이 길어졌다고 생각되었다. 하루하루 날짜는 넘어가고,이웃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씩 구정이라고 고향을 찾아간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까,그가 어머니를 보았던 것이 작년 구정 때였고,따라서 고향을 다녀온 지가 일 년이 된 셈이었다.그간의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생활이 힘에 겨운 것도 있었지만,사실 언제 다시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렇게 안타까운 일이 못 되었다. 지금도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수 십 년을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고,아직도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어머니는 월남하여서 먹고 살기조차 어려울 때는 그래도 고향이 나았다고 생각하며,헤어진 친지들이며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러 꼭 언젠가는 고향에 다시 가리라 했었고,근래 정부가 북쪽과의 회담을 발표하면서부터는 금방이라도 남북 왕래가 이루어질 것 같아 때로는 숨죽이며 방송을 들으며 밤잠을 설친 적도 없지 않았다 하였다. 그러나,그런 기대가 너무 어처구니없게 무너지고 말 때는 어머니는 끝없이 절망해야 했고,통일이 되면 아버지의 묘까지도 이장을 하겠다는 어머니의 뜻도 물거품처럼 포기해야 했었다. 세월이 삼십 년이면 이제는 아쉬움도 훌훌 털어 버리고,일어설 수도 있을 만한데 그 무엇이 어머니를 붙들고 있는 것일까. 고향,어머니의 한 속에 남은 그 고향은 도대체 무엇인가. 구정 다음 날은 일요일,줄포댁이 왔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상희와 상옥과 같이였다.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니 영민의 방에 와 있었다. 영민은 반가웠다.무엇보다 상희가 영민을 보고 아저씨를 부르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구정이고 해서 시집에 다녀온다며 집에 가는 길에 들렀다고 말하였다. 영민은 우선 자기가 떠나온 뒤의 일이 궁금하여 물었다. 아주머니.칠성호 사람들은 무사하죠? 저를 찾아온 사람들 이야기 들으신 거 뭐 없으세 요? 그렇지 않아도 그 갑판장이 우리 집에 와서 그러던디 소란 좀 떨었는개벼. 어떻게 됐는데요? 선주 영감이랑 그 이튿날 파출소에 몇 번씩 불려 다녔는디 나중엔 경찰서까지 가서 곤욕을 치렀다고 그렸어.갑판장 말로는,한석씨가 배를 탈라고 맘만 먹었지 실지로는 배는 안 탔다 고 말혔디야.그렁게,한석씨가 배를 탈라고 여기저기 알아 보러 댕기다가,겨울철이라 바다에 나가지도 않고 묶어 논 칠성호에 올른 걸로 때려 맞췄다고 혔대.거기다가 선주 영감이 손 좀 쓴 거 같다고도 그러던디,마침 겨울철이라 배 안 나가고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고 그렸 어. 예.선주 어른과 선원들이 저 때문에 애 많이 썼겠군요? 그려도 다행 아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죠? 한석씨 찾아온 사람들? 글쎄,그 날무터 선창을 한참 뒤졌다는 말만 갑판장헌티 듣곤 딴 건 몰라.포기허고 거기 떴겄지.그 뒤론 나도 뭘 보고 들은 건 없응게. 참,아주머니 가 장사하셔야죠. 구정으로 뱃사람들 거의 다 고향 찾어가고 손님들도 없는디. 상희와 상옥은 밖에 나가 뛰어놀다 방으로 들어왔다. 상희는 아저씨가 서울로 간다고 했는데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그러자 줄포댁이 영민의 말을 가로채고 몸이 아파 이 곳에 왔다고 하였다.상희는 다시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물었고 영민은 적당히 대답을 하였다. 상옥 아버지는 찾아 뵈었죠? 구정 전 날 시집에 가는 길에 들렀는디... . 많이 좋아지셨던가요? 그냥 그렇지,뭐. 애들 보고 기뻐하셨겠네요? 상희를 보고 어찌나 좋아허는지 내가 눈물이 나드랑게... . 줄포댁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는 애들이 있으니까 언제나 용길 잃으시면 안 돼요. 그녀는 말을 바꾸었다. 여긴 지내기가 답답허지 않나 몰르겄네? 처음에는 하루 가는 게 꽤 지루했는데 이젠 견딜 만해요. 먹는 것이랑은 괜찮고? 예. 그녀는 다시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내보내었다.그리고는 말을 계속 이었다. 어머니랑은 그 뒤 소식 모르고? 알 수가 없죠.제가 연락을 끊고 있으니까요. 곁에서 보기에도 안타깝고 혀서 그러는디,내가 뭐 도울 거 없어? 있으믄 말혀.아무 부담 갖지 말고 말여. 도울 거라니요.신세만 지고 있는데... . 아녀.내가 어머니 계시는 고향이라도 갔다 오믄 어쩔까?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걱정 마세요.어머닌 별 일 없으실 겁니다.어머닌 어떤 일이 있 어도 이 자식 얼굴 보기 전에는 절대 눈 감으시지 않을 분이에요. 그러고 보믄 한석씨 지독헌 사람 같어. 제가요? 보통 사람은 아닌게. 아주머니도,제가 무슨... . 한석씨 어떻게 보믄 우리 상옥이 아버지 젊었을 때허고 비슷혀. 예? 제가 어때서요? 하여튼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많었응게.악착같을 땐 한없이 악착같고,그러믄서도 마음이 여 릴 땐 또 한없이 여리고. 상옥 아버지께서 그러셨나요?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었다. 그 전에 우리 집서 서울 전화허던 사람은 눈치에 여자 같던디... . 예? 예.고향 후밴데,어머니 소식을 제게 알려 주곤 했습니다. 영민은 불현듯 선옥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영민은 기도원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누구에게든 서울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선옥을 만나서 기도원에 한 번 와 달라는 말을 전해 주었으면 하고 있었다. 그는 줄포댁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 기회에 그 부탁을 할까 하고 잠시 망설였다. 저기,그 여자 말여. 예? 실지로는 한석씨 애인이지? 영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아니에요. 내가 본게는 얼굴에는 보고 싶다고 써 있는디,안 그려? 영민은 염치를 무릅쓰고 줄포댁에게 부탁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그녀는 먼저 자기가 서울에 다녀오겠다고 나섰다. 우리 상옥이 하루만 데리고 있으믄 내 금방 다녀올 수 있는디.집 약도나 그려 줘.나도 서 울 길 조금은 알고 있응게 찾어갈 수 있을 거여. 아주머니가요? 상옥이 내일 학교는 어떡하구요? 집 떠날 적에 어떻게 될지 몰라 갖고,미리 상옥이 담임 선생님헌티 말혀 놓고 왔어.원래는 구정 시고 애 아버지헌티 갈라고 혔응게.마침 잘 됐네.지난 토요일허고 내일 월요일까지 시 간을 냈응게.그러고 본게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던가 본디. 그녀는 말을 계속하였다. 보고 싶은 사람 못 보면 병 든게,내가 그거 하나 원허는 건디 못 들어 주겄어? 주위에 누가 감시하고 있을는지도 모르는데요. 나야 누가 의심헐라고.요령껏 내 갔다 올 텐게 어서 약도 그려 봐. 영민은 선옥을 만나 볼 수 있는 길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영민은 그녀에게 선옥의 이름과 자신의 본명을 알려 주고,자세히 선옥의 집 약도를 그려 주었다.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집 주위를 감시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줄포댁이 고마웠다.무엇으로 그 고맙다는 말을 대신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하였다. 그녀는 상옥에게 상희의 병 때문에 서울의 병원에 갔다 온다고 말을 남기고 바로 상희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영민은 줄포댁을 서울로 보내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다.이상한 일이었다.선옥을 다시 만나 본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설렐 줄은 그는 정말 몰랐던 것이다. 그 만큼 자신의 생활이 힘들고 어려웠던 것일까.그녀가 어머니보다 더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그는 그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이미 그렇게 가 있는 것을 그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그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더없이 비겁하다고 뇌까렸다. 밤은 더디게 다가왔다. 그는 상옥을 재우고 밖으로 나왔다.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바람이 차가웠다.기도원의 방 불빛들이 하나씩 꺼지고 어둠이 눈앞에까지 이르렀다. 이 밤이 지나면 선옥을 만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밤 하늘 별빛들이 바다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의 가슴에 가득히 내리고 있었다. 제 12 부 재회 선옥은 고향에 다녀온 다음 날 늦은 시각까지 잠에서 깰 줄을 몰랐다. 전 날 집에 돌아온 뒤에 있었던 일에 신경이 씌어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을 이룬 것이었다. 그녀는 선우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었다.그리고는 밖에서 어떤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이내 누가 자기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걸치고 방 문을 열고 나갔다. 선우가 처음 보는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옥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목례를 하였다. 선옥은 어린애를 한 번 보고는 답하였다. 저를 찾아오셨다구요? 누구시죠? 저는 영민씨가 보내서 온 사람인데요. 예? 그 때 선옥 어머니가 밖에서 들어왔다. 그러자,선옥은 그녀와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누구냐? 선옥 어머니는 선우에게 물었다. 응? 나도 몰라. 선우는 영민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선옥 어머니는 이상한 예감이 드는 듯 선옥의 방 앞으로 다가가 방 안에서 들리는 말을 엿들으려 하였다. 엄마,왜 그래요? 선우는 그의 어머니를 말리려 했지만 도리어 혼만 나고 말았다. 네들이 이 애미 속이는 거지? 아까 들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영민이 얘기를 듣고 긴가민가 했더니,대체 무슨 일야? 선옥 어머니는 선우에게 따져 물었지만 선우는 잘 모르겠다는 말만 하였다. 선우는 어머니만 붙들어 세우고 시간만 벌려고 하였다. 엄마,손님이에요.금방 가실 텐데 가시고 나면 누나한테 들으면 될 거 아니에요.어서 엄마 볼일 보세요.엿듣는 거 손님이 알면 누나는 얼마나 무안하겠어요? 무슨 큰일을 내도 내지,저것이... . 선옥 어머니는 선우의 말을 듣기로 하고 부엌으로 갔다. 얼마 뒤에 그녀가 나오고 선옥은 대문 밖까지 배웅을 하였다. 정말 고맙습니다.영민 오빠에게 제 사정을 말씀 드려 주시고 곧 찾아간다고 전해 주세요. 그녀를 보내고 선옥은 집으로 들어와 어머니 앞에 불려 갔다. 대체 누구냐? 영민 오빠를 아는 사람이래. 선옥 어머니는 버럭 화를 냈다. 뭐? 오빠? 그 오빠 소리 안 집어 쳐? 이것이 어젯밤에 당하고선.너 얼마나 당해야 정신 차 릴 거냐,응? 어디 말 좀 들어 보자. 엄마,왜 갑자기 화를 내? 나간 그 여자,누구라고 그러디? 예사스럽게 보이지 않던데,응? 엄마,화내지 말고 말해.영민 오빠가 신세를 지고 있는 거 같아.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그냥 내가 궁금해 할까 봐서 소식 전해 주러 온 거야.영민 오빠 어머니 소 식도 알 겸해서. 어디서 뭐 하고 지낸다던? 기도원에 있대. 기도원? 거기서 무어 하는데? 얼마 전까지는 배를 탔다가 다시 피한 거래. 배를 타? 나를 붙잡아 간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그 곳에까지 쫓아간 거 같아.그런 얘긴 안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무사히 잘 있대. 너,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 애 어디 있는지 안다고 찾아가거나 하면 알아서 해.알았지? 그리고 편지 쓰고 그딴 짓 말아.너 여태 당한 거 생각만 하면 몸서리쳐 잠이 안 와.너 어제 아빠 한숨 못 잔 거 알아? 걱정 마. 나 다시 그런 꼴 못 봐.너 정신 똑바로 차려! 선옥은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영민의 소식을 들은 것이 기쁘긴 하였지만 당장 그에게로 달려가지 못하는 것이 그녀를 절망에 빠지게 하였다. 그녀를 따라 그대로 나서고도 싶었지만 어젯밤의 일이 그녀의 마음을 잡아당겼고,만에 하나라도 지금 이 시간 밖에서는 선옥의 행선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감시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선옥은 그만 포기해야 했다.게다가 식구들도 선옥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있어 그녀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영민이 그렇게 자기를 보고 싶어 한다는데도 갈 수가 없고,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도무지 궁리를 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리로 보아서는 하루 거리로는 엄두를 낼 수가 없어서 선옥은 생각할수록 막막하기만 하였다. 아마,지금쯤이면 영민은 그녀와 함께 도착할 것으로 알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짧게 느껴지던 겨울 낮이 오늘은 지루하기만 하였다. 영민은 선옥이 줄포댁과 같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오후 늦게서야 돌아온 것은 줄포댁 혼자였다. 영민은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줄포댁 앞에서 내색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기도원 안을 걸으며 영민에게 선옥을 만나 나눈 이야기와 영민 어머니 소식을 차근차근 전하였다. 그 아가씨 요즘 처지가 말이 아닌 거 같던디.자세허게 말은 안 허지만 내가 보기에도 집에 서 한석씨 참,영민씨라고 해야지.영민씨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개벼.당장 여길 오고 싶은 마음은 있는디 그게 쉽게 안 된다는 게,뭔가 이상허드라고. 그러겠죠. 영민은 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선옥이 오지 못하는 이유를 줄포댁을 통하여 알아 내려 한다는 것이 왠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옥은 상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줄포댁에게 병원에는 왜 들르지 않았느냐 물었다.그러나 그녀는 나중에 집에 가서 말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줄포댁은 막차를 타야 한다면서 자리를 일어섰다. 영민은 그들을 붙들고 싶었지만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갑자기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다시 언제 올지 모를 일이었다. 영민은 기도원 입구 정류소까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같이 걸었다. 아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앞 서며,뒤 서며 따라왔다. 줄포댁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근디 언제까지 이대로 지낼 거여? 곧 시국이 안정되고 하면 좋은 때가 오겠지요. 기도원에서 그 때까지 책이나 읽으믄서 지내. 그게 마음처럼 안 돼요. 아까도 말혔던 그 선옥인가 허는 아가씨 말여,언제 올지는 모르겄지만 너무 애닳아 허지 말어.오고 싶어도 못 오는 건게 서운해 허지도 말고.하여튼 오긴 온댔응게 오겄지. 이제 저에게 남은 건 선옥이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는 셈이죠.선옥이는 꼭 올 거에요. 바깥에서 허는 감시도 감시지만 집안에서도 달갑지 않게 생각헌대는디,너무 초조허지 말라 그 말여. 아주머니,신경을 써 줘 고맙습니다.언제 이 신세를 갚죠? 건강허고 아프진 않아얄 턴디. 어느 새 버스 정류장에까지 왔다.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차가 왔다. 막차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줄포댁은 아이들과 차에 올랐다. 영민은 손을 흔들었다.그들도 손을 흔들었고 이내 차는 미끄러지듯이 움직이었다. 영민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지켜 보았다.먼지 속에 차는 사라졌다. 그런데,영민은 그녀가 떠나고서야 언제 다시 그녀가 여기에 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말을 잊은 것인지,아니면 영영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인지 영민은 이상스럽게도 내심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그러니까 상당한 시간을 그는 그녀에게 큰 의지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오던 길을 돌아서 기도원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줄포댁이 다시는 자기를 찾아올 것 같지 않았다.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운이 없었다. 그는 지는 해를 등지고 터벅터벅 돌아왔다. 이제 정말 그에게 남은 것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선옥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영민은 끼니만 찾아 먹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이 기계처럼 날짜만 보내고 있었다. 아예 선옥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면 기다리지는 않을 텐데.그는 거의 방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만약에 선옥이 온다면 방으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산에도 오르지 않았다.방 안에서 우두커니 누워 있다가 방 주위를 맴돌고,기껏해야 기도원 입구까지 나가 보는 정도였다. 선옥이 무심하기만 하였다.그러나 막상 선옥이 온다 해도 순탄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감시를 받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또 미행이나 당한다면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두렵다는 생각도 났다. 그렇지만 그는 선옥이 보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사랑의 열정을 혼자 식히기엔 자신의 의지는 너무 약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시일이 갈수록 더 하였다.방에 있다가도 사무장이나 누가 찾아와서 영민을 부르면 혹시 선옥이 왔는가 싶어 벌떡 일어나 나가 보았다. 아주 잊어 버리다시피 하며 지냈던 때는 그것을 어떻게 참아냈는지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이대로 며칠을 지내면 그냥 미쳐 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2 월도 다 가고 있었다. 영민은 지금이면 선옥이 교사 발령이 났을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여러모로 분주하여 못 오는 것이라 스스로를 위안하였다.그리고 개학이 되고 하면 바쁠 것인데 그러면 선옥은 쉽게 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다.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을 듯하였다.또한 선옥이 당장이라도 여기를 찾아오고 싶어도 주변 여건이 닿지 않아 못 올 수도 있다고 여유 있게 마음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그러다가도 마음이 흔들리고,마음을 종잡을 수 없을 때는 기도원을 뛰쳐나가 선옥이 있는 서울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십 번을 마음과 싸우면서 영민은 선옥과 만난다는 것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벌써 집안에서 영민에 대한 문제를 마땅치 않게 보고 있었는데 줄포댁이 다녀온 뒤에 언뜻 비치는 그녀의 말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이제껏 그녀가 안 올 리가 없는 일인데.필시 집안에 자신으로 하여금 무슨 뜻밖의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말 선옥은 이대로 나타나지 않을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마음의 작정만 하면 어디든 못 올 수는 없는 건데.그녀는 무엇인가에 완강하게 붙들려 있는 게 확실하였다.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영민에게는 선옥을 풀어 낼 수 있는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별수가 없었다.이대로 주저앉아서 선옥이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는 별수가 없었다.영민이 나서서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어떤 결정을 번복하라고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야 선옥과 만나야 아는 것이지만,무엇인가에 서로의 사이는 뒤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그런 모습으로 그의 앞에 다가선 현실을 그는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그는 승복해야 했다.그것이 그에게는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이었다.그렇다.깨끗이 잊어 버리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었다. 이젠 선옥과 굳이 만나지 않더라도 그녀의 현실을 알 수 있는 것이었고,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에게는 빠를수록 좋은 일이었다. 무엇이든 나타나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옳다고 믿었다. 한편,선옥은 영민의 거처를 안 뒤로부터 다시 불안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영민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 만나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학교 발령에 민감해 있었던 때와는 달리 신학기에 발령이 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도 며칠 동안은 무덤덤할 정도로 지나갔다.단,영민과의 관계로 인사 발령에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여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과는 상관 없이 일이 잘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옥은 어떻게 하든 영민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러나,집 안팎으로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처지에서 그녀가 어떤 방법을 떠올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그녀는 영민의 확실한 거처를 알고 나서 영민에게 가지 못하는 것을 그에게 무슨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녀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은 영민이 자기를 원망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혼자 생활하기에도 적적하고 외로울 텐데 이틀이면 다녀올 수 있는 그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며칠을 미루다 학교 정식 발령 통보를 받았다. 다음 날은 부임할 중학교에 나가 보았다.그녀는 준비할 서류가 많아서 며칠을 분주하게 지냈다.곧 3 월이 되면 개학과 함께 선옥은 어렸을 때부터 꿈으로 여겨 왔던 음악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마음 속엔 영민에게 가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밉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이제 학교에 출근하다 보면 겨우 주말에나야 시간이 날 터인데 이러다가는 영민에게는 아주 가 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영민에 대하여 자꾸 신경이 씌어 마음이 놓이지 않고불안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한 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3 월이 시작되는 날,토요일이었다.이제 내일 모레면 개학이 되고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잠에서 눈을 뜬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마침 공휴일이어서 식구들은 늦잠을 자고 있었다. 선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옷을 챙겨 입었다.그녀는 이 시간이면 마음 놓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서둘렀다.그녀는 친구들과 근교에 놀러 가기로 하여 일찍 나간다는 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이 일로 식구들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그건 나중 문제였다.차라리 마음이 편했다.이렇게라도 한 번은 찾아가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주위를 휘둘러보았다.만약에라도 이 시간에도 자기를 감시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큰길로 나가는 주택가 골목길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장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갔다. 그리고,영민이 보낸 그 여자의 글씨가 적힌 종이를 펴 보고 행선지의 차표를 구하였다. 열차 시간은 그렇게 많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열차는 구내 방송이 끝나면서 미끄러지듯 역을 출발하였다. 우선 열차를 서너 시간은 족히 타야 했다.그리고 다시 내려 버스를 갈아 타고 두어 시간은 가야 되고,또 기도원까지 걸어야 하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영민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오후 세 시가 넘어야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가슴이 뛰는 것을 이길 수가 없었다. 돌이켜 보면 영민과 헤어진지 열 달이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그녀는 그래도 자기의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그리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겠지만,영민의 그간 생활은 그 시간이 너무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기에 그를 생각하면 그저 안타깝기만 할 뿐이었다. 열차는 더디 가기만 하였다. 잠을 청해 보기도 했지만 쉽게 잠도 오지 않았다. 신문을 사서 보기도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의 열두 시가 되어 열차에서 내렸다.역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버스를 기다렸다. 연계 시간이 맞지 않아 기다려야 했다. 버스가 왔다.버스가 가는 길은 시내를 벗어나면서 비포장도로라서 먼지가 많았다. 가다 쉬기를 몇 차례 하면서 이윽고 기도원 입구에 도착하였다.생각보다 찾기 쉬운 곳이었다. 기도원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를 따라가기로 하였다. 멀리 기도원 건물이 시선에 들어왔다.그 뒤로는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어 경치가 아름답게 보이었다. 그녀는 다시 가슴이 떨리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토록 보고 싶은 사람을,연락을 받고도 이제야 찾아온 것이 영민에게는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영민이 자기에게 여자를 보내고 얼마나 기다렸을까.아마 하루에 한 번씩은 이 길로 마중을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원에 들어섰다. 그녀는 다시 그 여자가 써 준 종이를 펼쳐 영민이 묵고 있는 방을 찾았다.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뒷편 끝 건물이라고 하였다. 걸음을 재촉하였다. 영민의 방이 보였다.그녀는 자신의 볼이 붉어져 온다는 것을 느꼈다. 방 문을 두드렸다. 소리가 없었다.다시 두드렸다. 영민 오빠. 그러자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 선옥이? 그녀가 방 문을 열었다. 영민은 막 잠에서 깨어나 방 문 쪽으로 나오다 선옥을 보았다. 오빠. 선옥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선옥아. 선옥은 영민의 품에 안겼다.금세 그녀의 볼에는 눈물이 흘렀다. 영민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녀를 꼭 안았다. 오빠,미안해,늦게 와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영민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참 떨어질 줄을 몰랐다. 힘들었지,오빠? 각오한 일었잖니?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자,선옥아,우리 앉아 얘기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영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손을 잡았다.영민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아직 그녀의 볼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는데 시간 많이 걸렸지? 응,지루해서 혼났어.오빠,나 너무 늦게 왔지? 아니.사실 난 네가 영영 못 올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봤어. 왜? 내가 언제까지 여기에 계속 있을지 모르는 것이고,또... . 영민은 말 끝을 흐렸다. 또,뭐야? ...... . 응? 너한테 내가 과연 필요한 사람인가를 생각했지. 그건 무슨 뜻이야? 우리가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곰곰히 생각해 봤어.그런데 생각할수록 나한테 너 는 멀리만 느껴지더라. 오빠,나를 지금껏 그 정도로만 생각한 거야? 그게 엄연한 현실 아냐? 오빠,이렇게 만났는데 겨우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어? 지금 시국도 불투명하고 자꾸 이상한 소문만 들리고 있어.이 생활은 쉽게 끝날 거 같지가 않아. 그래서? 선옥아,내가 너를 보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그 말을 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라. 영민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위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한 번은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럼,나 여기 오빠 만나러 오지 않았어야 했네? 이내 선옥은 자기 어깨에 올린 영민의 팔을 내리며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나도 얼마나 힘든지 알아? 집 밖에서도,안에서도 나를 감시하고,나도 마음 놓고 행동을 못 했어.엄마는 내가 그렇게 원했던 학교 교사도 말리면서 시집 보내려고 야단이었고.나는 내 가 학교 발령이 나야 그걸 구실로 오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믿었어.나도 오빠 같이 시간을 버티려고 얼마나 애썼는 줄 알아? 선옥아,내가 네 부모라도 그럴 거야.말이 그렇지,너 나 아무런 기약도 없이 나 기다릴 수 있을 거 같아? 오빠,나 다 참아 왔어.지금까지도 견뎠는데 앞으로도 왜 못 참아? 그녀는 수사관들에게 끌려가 겪었던 그 말이 입 안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영민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선옥아,그만 해.내가 좀 신경이 날카로웠었나 봐. 오빠,나 실망했어.나 여기 올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어.그런 데... . 영민은 선옥의 두 손을 붙잡았다. 다른 얘기 해.나도 네 마음 모르는 거 아냐.난 네가 가엾어서 그랬던 거야. 난 괜찮아.오빠가 더 힘든데,뭐. 그녀는 누그러졌다. 오빠,어머니 걱정했지? 무사하시겠지. 지난 구정 때 갔다 왔었어. 말 들었어.너에게 보낸 그 아주머니한테서. 그런데 그 뒤로 민구 오빠가 연락해 준댔는데 아직... . 별일 없으시니까 그러겠지.난 알아.우리 어머니 분명히 나를 보고 돌아가셔도 돌아가실 거 야.우리 어머니 항상 그러셨어.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형이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부터 소 식이 없으면 그렇게 마음을 놓으셨어.물론 나한테도 몇 년을 그렇게 생각하셨지. 구정 때 못 뵈고 온 게 후회돼. 그 아주머니도 그 얘기 했었어.어쩔 수 없잖아. 먼저 전화했을 때 말했지만,오빠 어머니하고 하룻밤 지낸 거 말야.그 때 기분 어땠는지 알 아? 어땠는데? 왜 그런 묘한 기분 있잖아.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선옥은 적당한 표현을 찾으려 했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알았어. 나 오빠 만나면 맨 먼저 그 얘기부터 하려고 했었는데. 그 때 많이 편찮으셨지? 어머니 뵙고 서울로 떠나려니까 발이 안 떨어졌었어.차표까지 샀는데 물리고 다시 오빠 집 에 갔었지.어머니 병원을 모시고 가야 마음이 편했거든.다행히 의사가 얼마간 치료하면 괜 찮다고 했었어. 배 타고 바다 나가서도 어머니 걱정에 일이 손에 안 잡혔어. 배는 힘들었지? 그런데 오빠,배를 탔었다면서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이 나 있는 데까지 쫓아왔더라. 그럼... . 선옥은 반사적으로 놀라면서 멈칫하였다.그리고는 자신의 행동이 실수였다고 생각하였다. 난 아직도 그게 의문이야.어떻게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말야. 선옥은 자기가 그 사람들에게 끌려간 내막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실은 오빠,나... . 선옥이 뒷 말을 잇지 못하자 영민은 섬찝하였다.그가 예상했던 일이 이미 벌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너 붙들려 갔었니? 선옥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영민은 그녀를 끌어안았다.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그는 몸을 떨었다.그는 어금니를 꼭 물고,저 가슴 깊은 곳에 고인 울분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았다. 선옥아,무서웠지? 그녀도 눈물을 참고 있었다. 오빠,미안해.나 끝까지 이겨내려고 했어. 그녀의 눈앞으로 그 때의 몸서리쳤던 상황이 스쳐갔다. 날 용서해.다 내가 당해야 할 대가를 선옥이와 어머니가 당하고 있구나. 그 얘긴 그만 해.난 생각하기도 싫어.그 후로 난 오빠한테 불길한 일이 있을까 봐 얼마나 애태웠는지 몰라.그렇지만 난 오빠가 있는 정확한 곳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어. 지역만 알아내서는 찾기가 어려웠겠지.아마 그 사람들은 며칠을 그 지역을 수소문했을 것 이고 배를 탈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그 곳까지 왔었을 거야.마침 내가 너한테 보낸 그 줄포 댁이라고 부르는 아주머니가 장사하는 집에 와서 나를 찾았던 거지.다행히도 그 아주머니가 그들을 보고 일찍 나에게 알려 준 거야.그리고 결국 그 아주머니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고. 정말 다행야.오빠 무사하다는 연락 듣고 오빠 만나고 싶어 잠도 못 잔 적이 한두 번이 아 냐. 난? 나도 너한테 그 아주머니 보내고 너 기다리느라 눈이 빠지는 줄 알았어.내가 기도원 입구까지 몇 번을 나갔다 온 줄 알아? 아까도 어제 밤 내내 못 자고 새벽에야 간신히 잠이 들어 그 때서야 깬 거야.솔직히 난 네가 온다는 걸 거의 포기하고 있었어. 그렇게 날 기다린 사람이 나한테 그런 무심한 말 할 수 있어? 선옥은 영민의 가슴을 툭 쳤다.그리고는 웃었다.영민도 살짝 웃었다.서로 마주보고 웃는 것이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되었다. 두 사람은 다시 껴안았다.그 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그들에게는 너무 긴 것이었다.그들은 서로가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오빠,나 내일 모래면 첫 출근야. 넌 좋겠다.너 하고 싶은 일 하니까.그게 너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잖아. 나 이제 학교 나가면 시간이 나지 않을 거 같은데,언제 다시 오지? 이렇게 보았으면 됐지.선옥아,너,좋은 선생님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고,잘 따르는 선생님말야.선옥인 잘 할 거야. 나,잘 할 수 있을까? 네 꿈이 그것이었는데,멋지게 한번 해 봐. 응,나 오빠 생각하면서 열심히 할게. 학교 이야기로 두 사람은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마냥 즐거웠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이 저녁이 가고,아침이 오면 선옥은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을까.그녀는 쉴새없이 그 어디로 급하게 달려가는지도 모르는 시간을,단념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원망을 하고 있었다. 오빠,나 여기서 오빠랑 살면 안 될까? 뭐? 내일,나 오빠 혼자 두고 어떻게 떠나? 바보같이. 갑자기 내일 헤어져야 한다는 게 두려워. 선옥아,우리 견디자.머지않아 좋은 때가 올 거야. 오빤 항상 그런 얘기만 했어.그 좋은 때가 대체 언제야? 언젠가 오겠지. 영민은 그것으로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이 한없이 막막하게만 보이었다. 제 13 부 절망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지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기도원 뒷산에 올랐다. 선옥은 영민의 팔을 놓지 않았다.영민은 산에 오르면서 자기가 그 산을 다녔던 이야기를 하며 경치가 좋은 곳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산의 정상은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그들은 잘 뭉쳐지지도 않는 눈으로 눈싸움을 하였다.그녀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예쁘게 보였다. 그는 언제나 예쁘게 보이는 선옥이 좋았다.처음 시골 교회에서 만나던 때부터 선옥은 그 행동이 예쁘다고 느꼈었다.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가 예쁘다고 느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선옥은 자꾸만 자기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가끔 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어느 낯선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은,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사랑을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는 것으로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이 불안하였다.그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밉기만 할 뿐이었다. 영민은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선옥도 따라서 하였다. 산의 정상은 무엇보다 멀리 내다볼 수 있어 시원스러웠다. 마음이 울적할 때 여기에 오면 가슴이 트이고 속이 후련했어.날씨는 차가웠지만 여기서 몇 시간이고 있다 가곤 했었지. 저 아래 보이는 신작로가 나 타고 온 버스 길인가 본데? 맞아.그러니까 이 산을 저 쪽으로 돌아서 온 거야. 영민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만 내려가. 춥니? 곧 어두워지겠어. 두 사람은 산에서 내려왔다. 그들이 기도원 뒤편 언덕에 이르렀을 때는 어느덧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빠,저기 봐. 선옥은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름답다,그지? 그러나 영민에게는 그 노을보다 붉게 비치는 선옥의 얼굴 모습이 더 곱다고 느꼈다. 우리 여기 좀 있다 갈까? 영민은 선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그리고 그들은 노을을 향해 서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선옥은 자신이 살고 있던 세상을 멀리 떠나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그녀는 이것이 행복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행복이란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왔다 가는 것임을 그녀는 깨닫고 있었다.마치 착각처럼.그렇다.그건 자기만이 갖는 착각일 뿐이었다. 해는 벌써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오빠,저 해가 다시 저렇게 사라질 땐 난 서울에 있겠지? 그녀는 사라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였다. 난 여기에 혼자 서 있겠지. 영민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당겼다. 그는 기도원에 들어온 뒤로는 술과 담배를 할 기회가 없었지만,이따금 답답하여 산에 오를 때면 한 번씩 피우곤 하였다. 그는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얼마나 지났을까.기도원 건너 마을 쪽에서 웬 불길이 치솟았다. 선옥아,저기 봐. 뭔데? 쥐불놀이야. 그래,오늘이 정월 대보름이야.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둥근 달이 이미 떠올라 있었다. 야! 오늘 우리를 위한 밤 같아! 선옥은 어린애같이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오빠,우리 소원 하나씩 빌자. 소원? 저 달님한테 소원을 비는 거야.오빠,나 따라서 해 봐,이렇게. 선옥은 두 손을 모았다.영민도 그녀가 하라는 대로 하였다. 자,지금부터 소원 빌어. 두 사람은 각기 마음에 가지고 있는 소원을 빌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유난히 포근한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오빠,무슨 소원 빌었어? 비밀. 난 다 알아. 알았으면 됐어. 그래도 말해 봐.내가 알고 있는 거하고 같나 보게. 넌? 오빠부터 말 해. 관둬. 오빤 틀림없이 어머니 위해 빌었을 거야.그렇지? 몰라. 어서 말해 줘. 선옥은 내심 영민이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해 주었으면 하였다. 너부터 하라니까. 그녀는 영민을 위해 기도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선옥아,날씨가 차가워.들어가자. 조금만 더 있다가. 건너 마을에서는 쥐불놀이 불길이 가라앉으면서 아이들의 불놀이가 한창이었다.아이들의 함성이 간간이 밤의 허공을 뚫고 다가왔다. 오빠,우리 모닥불 피우자. 모닥불? 내가 가서 검불이랑 나무 조각 주워 올게. 선옥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한 곳에 나무 조각과 검불을 쌓았다. 오빠,불 붙이자. 영민은 성냥을 그었다. 멋진 밤이 되겠지? 두고두고 기억날 밤이 될 거야. 선옥은 신이 나는 듯이 들떠 있었다. 모닥불이 타올랐다. 두 사람은 그 앞에 서로 몸을 기대고 앉았다.선옥은 영민의 품에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불빛이 뜨거웠다.그녀의 영민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뜨거웠다. 오빠. 응? 나,안아 줄래? 영민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꼭 안았다. 사랑해.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잊지 않을게,그 말. 오빠,이 밤으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어.오빠와 이렇게 둘이 있는 채로. 영민은 선옥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맞추었다.그녀의 입술은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느끼고 그녀는 그를 느꼈다. 밤 하늘 별들이 두 사람의 가슴으로 하나씩 떨어졌다. 서로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였다. 자리를 일어서야 했다.영민이 시계를 보았다.열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젠 들어가야지. 영민은 발을 비벼 가며 모닥불을 껐다. 우리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고 가는 거야? 거기에 가면 언제나 기도할 수 있어. 영민이 하는 말에 선옥은 그러자고 하였다. 두 사람은 기도원에 들어섰다. 많은 방들은 불이 꺼지고 밖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예배당 건물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 내어 기도하면서 그 무엇인가를 갈구하였다.그들의 기도 소리가 밤의 고요를 흔들고 저 신을 향해 열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그런데,영민이 빈 자리에 막 앉으려는 참이었다. 누가 등을 쳤다.영민은 고개를 돌렸다.사무장이었다. 잠깐 밖으로... . 영민은 선옥에게 눈짓으로 자리에 있으라 하고 사무장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선옥은 개의치 않고 기도할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선옥은 한참 뒤에 주위를 둘러보았다.영민은 보이지 않았다. 언뜻 영민을 불러낸 사무장의 표정이 떠올랐다.필시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영민을 찾아야 했다. 예배당을 나와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이상한 일이었다. 아가씨. 누가 불렀다.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영민을 불러낸 그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선옥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아저씨,우리 오빠 어디 있죠? 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조용히 저를 따라와요. 예? 그녀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예배당 건물 옆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그리고는 기도실로 보이는 조그만 방의 문을 열고 선옥을 들어오라고 손짓하였다. 기도실은 두 사람이 들어서면 거의 빈 공간이 없을 만큼 비좁았다. 그는 차분히 말을 꺼냈다. 아가씨,놀라지 말아요.아가씨 오빠는 지금 저 뒷산으로 몸을 피했어요. 뭐라구요? 불현듯 선옥은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늦게 어떤 사람들이 찾아왔어요.기도원 사무실에 와서 아가씨 오빠를 찾는 거였어요. 그 전에 안면이 있는 아주머니가 부탁을 해서 아가씨 오빠를 지켜 보아 왔지만 저는 무슨 일로 피신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채고 있었죠.사실 이런 곳엔 요즘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 깐요.헌데,전 아가씨 오빠와 여러 번 대화를 해 보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 어요. 선옥은 마음이 다급해져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저씨 고맙습니다.저 이만 갈게요.저는 오빠를 따라가야 돼요. 그녀는 눈물이 글썽하였다. 아가씨,나가면 아가씨도 위험해요.지금 그 사람들은 원장실에서 원장님께 기도원을 수색할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원장님은 얼마 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영장 없이는 안 된다고 거절하고 있지요.만약 저들이 수색하게 되면 기도원에 온 사람들한테 기 도원 인식도 안 좋아지고... 아저씨,알았습니다.이젠... 그는 말을 끊고 나가려는 선옥을 붙들었다. 오빠는 가면서 아가씨를 내일 무사히 여기를 빠져 나갈 수 있도록 하라고 했어요. 아니에요. 그녀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가슴이 뛰었다.그 사람을 뿌리치고 영민의 방에 가서 짐을 챙겨 가지고 영민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여기서 조금 더 지체하면 정말이지 영민을 다시는 못 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가겠습니다. 선옥은 기도실 문을 박차고 영민의 방으로 뛰어갔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리고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영민만 쫓아가야 했다. 그녀는 영민의 방에 가 가방을 챙겼다.영민의 짐이야 가방 하나면 족하였다. 기도원의 뒷산을 영민과 낮에 한 번 갔다 온 것이 그녀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그리고 보름달이 떠서 산 속이라도 그렇게 어둡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산길은 쉽게 찾았다. 영민은 분명히 저 산을 넘어 신작로로 달아날 것이라고 판단하고 우선 정상을 향해 가기로 하였다.그녀는 산 속이 무섭다는 것도 아주 잊어 버리고 있었다. 산은 예상했던 것처럼 달빛으로 환했다. 그녀는 달빛이 그렇게 환한 줄은 처음 알았다.겨울이라 나무는 가지들뿐이어서 산길은 충분히 분간할 수 있었다. 기도원과 멀어지면서 그녀는 영민을 불렀다.밤이라 조용해서 소리를 지르면 영민이 멀리 있지 않는다면 자기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오빠! 영민 오빠!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계속 산길을 올랐다. 땀이 전신을 씻어 내렸다.숨도 가빴지만 쉴 수가 없었다. 영민 오빠! 지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기도원에서는 지금쯤 수사관들이 영민의 방을 찾아내고 달아난 줄 알고서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영민을 만나서 피신을 해도 함께 있고 싶었다. 비로소 정상에 올라 섰다. 그녀는 숨을 돌리고 산 너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마을의 불빛이 몇 개 보였다. 영민이 간다면 저 마을로 해서 몸을 숨기고,통행금지 시간이 지나면 신작로로 갈 것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해 보았다. 바로 그 때,갑자기 멀지 않은 산 아래에서 손전등 불빛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편 두려웠다.영민이 손전등을 들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그녀는 일단 그 불빛이 보이던 곳으로 서서히 접근해 가 보았다. 이 깊은 밤에 산 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득,그녀는 저 움직이는 불빛이 영민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녀는 더 다가가 소리를 냈다. 영민 오빠 아냐? 손전등이 비쳤다. 선옥아. 오빠 맞지? 선옥은 내리막 산길을 달려갔다. 틀림없는 영민이었다.그녀는 와락 몸을 던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그녀는 거칠게 숨을 쉬었다.힘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영민이 그녀를 붙들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어? 영민에게는 선옥이 너무 뜻밖이었다. 혼자만 가면 난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선옥아,자꾸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나,오빠 앞으로 못 만나는 줄 알았어. 그녀는 울먹였다. 영민은 선옥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힘껏 그녀를 안고 땅위로 넘어졌다. 그는 선옥의 볼에 얼굴을 댔다.서로 살을 부비고 싶었다.그녀의 머리칼이 부드러웠다.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두고 자기 혼자만 달아날 수는 없다고 그는 몇 번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무가지들 사이로 벌써 달은 중천에 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산 너머의 산길은 뜻밖에도 가팔랐다.길도 좁아 겨우 한 사람이 다니면 될 정도였다.그래서 이 쪽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다고 영민은 말하였다. 영민이 앞장을 서고 선옥은 뒤를 따랐다. 따라올 수 있겠어? 선옥은 자신이 매우 지쳐 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았다. 견딜 만해. 이거 네가 들어.위험하니까. 영민은 손전등을 선옥에게 건네 주고 가방을 들었다. 어디서 난 거야? 아까 그 사무장님이 준 거야.밤 산길 조심하라구. 그랬었구나.난 이 불빛 보고 오빠가 아닌 줄 알았어. 그런데 너 언제 가방까지 챙겼어? 앞서 가던 영민이 뒤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오빠 살림인데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기겠어? 오빠 못 만나면 이거 가지고 서울까지 가려 고 했어.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이거 별것도 없는데,텅 빈 가방 뭐에 쓰려고? 그는 혼잣말처럼 말하였다. 그런데 내가 잘 챙겨 왔나 모르겠어. 나는 이 텅 빈 그 가방만 보면 눈물이 나.이 번에 아주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 그러다 영민이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했다.그는 겨우 나무를 잡고 몸을 가누었다. 오빠,조심해. 응,너도 조심해.길이 험한 편야.잘 따라와. 오빠,이제 여기서 어떻게 할 거야? 지금은 통행금지 시간이야.이대로 꼼짝 못 하고 산 속에 있어야지.통금 해제되면 저 신작 로로 해서 다른 곳으로 피신할 곳을 찾아가야지. 어디로 가려고? 아직 정하지 못했어.하지만,나 하나 어디 갈 데 없겠어? 오빠,좀 쉬었다 가자.나 힘들어. 얼마만큼 가다 두 사람은 쉬었다. 오빠,내가 어떻게 이 산을 올라왔는지 나도 이해가 안 돼.지금 생각해 보니까 끔찍해. 이제 좀 여유가 생겼나 보구나. 나중에 우리 옛날 얘기할 때,오늘 있은 일 얘기하며 웃을 거야. 그러겠지. 오빠,이제 어디로 간대? 선옥은 그 일이 몹시 걱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그건 내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날이 새면 넌 바로 서울로 가는 거야.난 다시 내가 배 를 탔던 그 항구로 갈까 하고 방금 생각해 보았어. 다시 거기로?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까 거기는 마음이 참 편한 곳이었어.거기도 위험하면 내가 탔던 배 타고 섬에 들어가 지낼까 해. 섬에? 물론 거기도 안전하지 않겠지만,고깃배 타고 바다 나가면 일도 할 수 있고,돈도 벌 수 있 고,시간 보내기도 좋고.거기는 일손이 부족해서 우리 같은 사람 잘 받아 줘.그리고 했었던 일이니까 신간은 편할 거 같아.실지로 기도원은 지루하고 답답했어. 오빠,난 지금껏 오빠가 하는 일이면 다 믿음직스러웠어.오빤 이 고비 잘 헤쳐 나갈 거야. 잠시 말을 그쳤다. 산의 고요가 깊다고 느꼈다.더없이 달빛도 그윽하였다.밤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영민은 시계를 보았다.통행금지가 해제되려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그런데,어디선가 희미하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영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선옥도 일어섰다. 소리는 한 곳에서 나는 게 아니었다.사람의 목소리도 들렸다. 얼마 뒤에는 산 정상 쪽에서 손전등 몇 개가 교차하였다. 어서 내려가.우리를 쫓아 오고 있는 것 같아.무서워. 선옥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영민은 선옥을 붙들고 안심을 시켰다. 두려울 것 없어.마음을 단단히 먹어.그리고 너,정신 차려야 돼.알았어? 그녀에겐 그의 모습도 불안해 하는 빛이 역력하게 보였다. 영민은 무엇을 다짐했는지 손에 든 가방을 선옥에게 던져 주며 말하였다. 손전등은 이리 주고 넌 가방을 들어.경찰이 깔렸어.어쩌면 이 산을 포위했는지도 몰라.넌 이대로 아래로 내려가.저들이 널 붙잡으면 나를 못 보았다고 해,알았지? 오빠,어떡하려구? 난 저쪽 산을 돌아 다시 기도원으로 내려갈게.그게 안전해. 난 어떻게 해? 선옥은 울음이 막 터져 나오는 것을 참았다. 어쨌든 여기에서 영민을 보내야 했다. 선옥은 가슴이 조여 왔다.순간,어지럽다고 느꼈다.식은 땀이 등을 적셨다.무서웠다. 영민은 나무가 빽빽히 들어 찬,길도 나지 않은 산 속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윽고 영민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저기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밤의 적막을 찢었다. 선옥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큰 나무 뒤로 숨겼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사람들의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산을 진동하며 자기 쪽을 향해 달려 온다고 생각하였다. 박영민! 또 누군가 외쳤다. 그런데 그 소리는 영민이 간 산 속에서 나는 것이었다. 이미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서! 손전등 불빛이 선옥에게도 달려들다가 비껴 갔다. 선옥은 기운이 빠지는 것을 붙들려고 안간힘을 다 하였다. 그 때였다. 무언가 휘두르는 것에 맞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악! 하고 여러 소리 사이로 누군지 모르는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서, 안 돼! 선옥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마음 속으로만 외치다 까맣게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제 14 부 꿈 선옥이 정신을 차린 것은 일요일 낮,그녀의 집 근처 병원 응급실에서였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땐 주위에 그녀의 어머니와 선우가 있었다. 아니,너 어떻게 된 거냐? 선옥 어머니가 다가와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누나,괜찮아? 선옥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기력이 없었다.그리고 말하는 것도 귀찮게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선옥 어머니는 성화였다. 너 영민이 만나고 온 거지? 선옥의 영민을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영민은 그 뒤로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묻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들었던 외마디 소리가 낯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랬었다.그 소리는 영민의 소리였다. 선옥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혹 영민이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산 속으로 사라져 가던 영민의 모습이 어렴풋이 다가 왔다. 그건 꿈을 꾼 것이었다.그래 꿈이었다.꿈 속에 영민을 만나고 온 것이었다. 이것이 기어코 무슨 일을 냈어. 선옥 어머니의 한숨이 선옥의 귓전에 머물렀다. 누나,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을 해 봐.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선우야,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니? 정신이 든 거야? 경찰에서 연락이 왔었어.그냥 병원에 누나 있으니까 데려 가라고. 그게 전부야? 그래 이것아.그런데 너 어제 어디에 간다 하고 그렇게 일찍 말도 없이 나갔어? 친구하고 놀다 왔어. 뭐? 너,옷하고 네 꼴이 이게 뭐냐? 어디 산에 가서 뒹굴고 한 거야? 선옥은 산길을 헤매던 것과 영민과 같이 누웠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도 모르겠어. 너 영민이 만나러 갔었지? 아냐. 선옥 어머니는 선옥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선옥은 적당히 말을 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친구들하고 근교 별장에 갔다 나 혼자 나오다가 길가에서 그만 정신을 잃었던 거 같아.그 것밖에 기억이 안 나. 어제 한숨 잔 줄 알아,식구들이? 엄마,미안해.전화라도 내가 했어야 하는데 놀다가 나도 깜빡했어.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늙어.어서 일어나.집에 가야지. 누나,일어서 걸을 수 있겠어? 선우가 선옥을 일으켰다. 아빤? 시내 일이 있어 나가셨어,의사 말만 듣고. 선옥은 참말로 이상하였다.어떻게 집 근처 병원에까지 자기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자신이 산에서 쓰러진 뒤 경찰에 의해 발견되어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동네 병원에 보낸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럼,집 전화 번호는 어떻게 알고 집에 전화를 했을까.그러나,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그렇다.그 사람들은 어제 이른 아침 자신이 집을 나설 때부터 자신을 미행했던 것이었다. 분명히 집을 나설 때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아무튼 선옥의 얼굴을 알고 선옥을 미행한 사람이라면 그건 당연히 지난 번에 선옥을 거리에서 붙잡아간 그 사람들이 확실하였다. 그렇다면 영민에게 피해를 준 것은 자신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녀는 선우의 부축을 받고 집에 돌아오면서 마음이 불안하여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영민의 생각으로 괴로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민을 만나러 간 것이 결국 그에게 불행을 안겨 주기 위해서였던가. 그녀는 생각할수록 암담하였다.그리워 보고 싶어 달려간 것이 그에게 벗을 수 없는 굴레만 씌우고 온 것인가. 선옥 어머니는 선옥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시장에 간다 하고 갔다.그녀는 선우의 부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동안 그녀는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았다.많은 것들이 변해진 것만 같았다.자기의 주위에 있는 것들이 지각 변동을 일으켜 상당히 뒤틀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그녀는 그것을 자신이 수습을 해 보았으면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묘한 일이었다.단지 그녀는 그 어떤 것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할 따름이었다. 현관 문 여는 소리와 함께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옥아,아빠 들어가도 되니? 선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그녀의 아버지가 옆에 다가와 앉았다. 그냥 누워 있어. 아빠,죄송해요. 좀 어떠니? 아픈 데는 없어? 예,좀 피곤할 뿐이에요. 어디에 갔었어? 식구들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아니? 친구들하고 놀다 그렇게 됐어요.오늘 아침 일찍 서둘러 혼자 집에 오려다 저도 모르게 길 가에서 쓰러진 거에요. 내일이면 네 첫 출근인데 그것 때문에 긴장을 했는가 보구나.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해요. 너 어제 엄마가 그러는데 영민이가 보낸 사람이 언제 우리 집에 왔었다면서? 예,서울 올라온 길에 영민 오빠 무사히 잘 있다고 소식 전해 주고 갔어요. 엄마는 네가 그 소식 듣고 영민이 있는 곳을 안다면서 거기에 갔다고 야단이었어.어디를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지.쪽지에 뭐라고 써 놓고 나가 버리면 집에 있는 식구들은 얼 마나 가슴 조이고 하겠어? 특히 다 큰 처녀가 말이다.이 상황에서 엄마는 네가 영민이한테 갔다고 생각하지 않겠어? ...... . 만약에 영민에게 다녀온다 치자,아빠에게라도 말하고 가면 되었을 거 아니냐? 선옥 아버지는 조용히 말하였다. 선옥은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혹시 아버지는 자기가 영민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병원에서 의사의 말을 듣고 갔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영민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끝까지 어떤 이야기도 더 꺼내지 않았다. 그럼 쉬어라.내일 출근은 할 수 있겠니? 예,해야죠. 선옥 아버지는 방을 나갔다. 선옥은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면 해 줄 수도 있는데,왜 그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별수없이 그녀는 아버지도 어머니와 같이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는 단정을 내렸다. 선옥은 무엇이 먹고 싶었다.배가 고팠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누나,내가 뭐 차려 줘? 선우가 도우러 왔지만 관두라고 하였다. 괜찮겠어? 그녀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몸이 비틀하였다.그녀는 간신히 식탁 의자에 앉았다. 누나,정신 차려! 선우야,나 물 좀 줄래? 가 누워 있어.내가 갖다 줄게. 그 때 전화 벨이 몹시 사납게 울렸다. 선옥은 자기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어서 거실로 갔다.그녀는 쓰러지 않아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하였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선옥씨 집 아닙니까? 선옥에겐 귀에 익은 소리였다.정 순경이었다. 제가 선옥인데요. 어? 선옥씨 왜 목소리가 기운이 없어? 몸이 안 좋아서요. 혹시 무슨 연락 받은 거 아냐? 무슨 연락이라뇨? 저... . 무슨 일 있는 거에요?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오늘 새벽에 말야,영민이 어머님이 돌아가셨대. 예? 선옥씨 다녀간 뒤로 교회에 계속 못 나오셨었대.오늘은 김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는데 가 보니까 주무신 채로 돌아가셨더라는 거야. 그녀는 입을 열리지 않았다.그러면서 이상하게 산 속으로 사라져 가던 영민의 뒷모습이 머리를 스쳐갔다. 의사 말로는 돌아가신 시간이 오늘 새벽 두 시쯤이라고 했대. 새벽 두 시요? 그녀는 하마터면 정신을 다시 잃을 뻔하였다. 별안간 영민의 그 외마디 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닥쳐 오고 있었다. 그것은 절망의 소리였다. 그럼,어떡하지? 그녀는 정 순경이 영민의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았어.이만 끊을게. 그녀는 초점을 잃어 갔다.선우가 달려와 붙들었다. 누나,왜 그래? 그녀의 아버지가 나왔다. 나 아무렇지 않아. 그녀는 의식적으로 몸을 세우려 애썼다. 애야,들어가 누워 있어.선우야,누나 어서 침대에 눕혀라. 괜찮아요. 무슨 전화냐? 영민 오빠 어머님이 돌아가셨대요. 그래? 그예 그렇게 가셨구나. 선옥 아버지는 더 말이 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누나,시골에 가 봐야 되는 거 아냐? 영민이 형은 어떻게 연락을 하지? 선우가 다급해 하였다. ...... . 선옥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자신의 몸은 아무도 모르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어느 산 속이었다. 어느덧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는데 산길 사이로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선옥의 기억으로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뿌연 산길 사이로 하얀 옷을 입은 영민의 걸어 가는 뒷모습이 보이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길을 가고 있었다. 선옥은 영민이 반가워 그를 부르면서 쫓아 갔다. 그런데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어디를 가는지 바삐 길을 재어 가고 있었다. 선옥은 다시 영민을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돌아보지도 않고,서지도 않았다. 산길은 갈수록 더욱 안개로 가득하고 길은 험하게 나타났다. 선옥은 기력을 잃고 그만 산길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좀처럼 일어설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영민은 가던 길을 갈 따름이었다. 선옥은 마음 속으로만 말하고 있었다. 영민이 가는 길은 끝이 없을 것이라고. 선옥아,일어나야지. 어떻게,학교는 갈 만하니? 누나가 그렇게 원했던 꿈이 실현되는데 힘을 내야지. 식구들의 소리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 선옥은 몸을 일으키며 혼잣말처럼 물었다.그녀는 마치 실성한 사람같이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그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꿈이었다. 얘야,서둘러야지.정신 좀 차려 봐. 선옥 어머니가 선옥의 몸을 흔들었다. 누나,오늘 첫 출근이니까 예쁘게 하고 가야 할 거 아냐,응? 화장도 하고. 알았어. 선우의 말에 선옥은 일어섰다. 선옥은 어제보다는 몸이 가볍다고 느꼈다. 출근은 해야 했다.그녀는 서둘렀다.선우의 말대로 화장도 하고 잘 차리고 싶었다. 그녀는 세면을 하고,식구들과 식탁에 마주앉았다. 기쁘지 않니? 선옥 어머니가 물었다. 왜,엄마 눈엔 그렇게 안 보여? 기왕 시작한 거니까 잘 해라.몸은? 아무렇지도 않아,이젠. 참,누나,어제 밤에 시골에서 전화... . 선우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끼어들으려 하자 선옥 어머니가 말을 낚아 챘다. 영민이 어머님 돌아가셨다면서? 선옥은 그저 정 순경이 다시 한 번 전화를 했으려니 하였다. 선옥이 대꾸가 없자 그녀의 어머니는 말을 계속하였다. 그 애는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제 어머니 눈 감는 것도 못 보았을 거 아냐? ...... . 너,물론 가도 못 하겠지만,시골에 간다 어쩐다 하지도 마. ...... . 그리고,지난 번 아빠가 백화점에 가서 너한테 사 준 옷 있지? 그 옷 입고 가.그게 어울릴 거 같다. ...... . 네가 그렇게 원하고 했으니까 한번 열심히 해 봐,딴 생각 말고,이젠.알았어? ...... . 선옥은 집을 나섰다.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서 큰길까지 걸었다. 그녀는 걸으면서,영민 어머니의 장례는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몹시 궁금해 하였다.그리고 그녀는 시골에 가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지만,지금의 처지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다만,장례식은 교회에서 김 목사의 정성으로 무사히 치러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심을 하기로 하였다. 큰길에 나온 선옥은 시내버스 정류소로 가 차를 기다렸다. 아침의 거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매우 부산하였다. 시내버스들이 몇 대 오고 갔지만,선옥이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 손목시계를 보았다. 버스가 오는 쪽을 향해 발돋음을 하였다. 그러다 문득,그녀의 앞에 선 어느 남자가 보는 조간 신문에 눈길이 멈추었다. 선옥은 순간적으로 움찔하였다. 그녀는 몸이 굳어 온다고 느꼈다. 지난 밤의 이상한 꿈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그리고,그 위로 산 속에서 사라져 간 뒤 그녀의 귀에 들렸던 외마디 소리가 닥쳐 왔다. < 등산객 가장한 수배자 실족사 > 선옥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니,그럼 영민 오빠가 죽었다는 말인가. 아침 식탁에서 선우가 말하려 했던 것이 그 소식이었던가. 그녀는 신문을 샀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조금 전에 보았던 기사를 찾았다. 그것은 분명한 영민에 대한 기사였다. 기사는 경찰의 발표에 의한 것이었다. 내용은,수배자 박영민이 지난 2 일 새벽 두 시로 추정하는 시간에 등산객으로 가장하여 피신하기 위해 야간 등산하던 중 실족하여 죽은 것을 인근 주민이 낮에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하였는데,경찰이 신원을 확인한 결과 긴급조치 위반자였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거리 한가운데로 나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파란 아침의 봄 하늘을 우러러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하늘은 꿈 속의 산길처럼 뿌옇게 지쳐 있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선옥은 겨우 학교까지 갔었지만 교무실로 가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교장실을 찾아가 교장 앞으로 사직서를 냈다. 그녀에게는 이제 그 자리가 필요 없는 것이었고,이미 그것은 꿈도 아니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나왔다. 그녀에게는 따로 갈 곳이 있었다.